‘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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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2)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01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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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지만 나는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범위 내에서 시험은 낼 테니까,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만 다 알면 100점 맞을 수 있다.”

그런 믿음으로 나는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지 않고 뚫어지게 보고 들었다. 나는 필기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조금씩 필기했을 뿐, 노트 정리에 시간을 쏟지 않았다. 내 믿음대로 시험은 선생님들이 수업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배운 범위 내에서 나온 시험문제에 답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남보다 비교적 쉽게 공부했고, 또 공부처럼 쉬운 것도 없었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좋았고 시험이 쉽게 나면 다른 아이들도 100점 맞을 수 있겠다 싶어 별로 신이 나지 않았다.

경복이 집에 가서 공부하자고 갔을 때도, 나는 저녁 먹은 후 시험공부를 조금 하다 평소대로 8시가 좀 지나자 책상에 엎드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시험을 치렀고, 다음 날 저녁에도 경복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함께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또 9시도 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미안해서라도 공부를 좀 하려고 했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경복이가 몇 시까지 공부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나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똑같이 반복되었다.

그후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을 때 경복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너 정말 우리 집에서 일찍 자기만 하던데 어떻게 1등을 한 거야? 그동안 난 네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했었어.”

경복이로서는 내가 정말 집에서 공부를 안 하는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자기네 집에서 공부하자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로 인해 경복이와는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시합 나가느라 수시로 수업 빠지고 며칠씩 다른 도시로 원정 다니는 내가 전체 1등이라는 것에 다들 의아해했다. 게다가 3년 내내 반장을 하고, 3학년이 되어서는 전교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 충남 중고등학교 학생호국단 활동까지 했다. 졸업식에서는 성적 최우수상을 받았다.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머리가 하얀 정구개 지리 선생님은 나를 신동이라고 치켜세우며 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셨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체격 좋은 공민 선생님은 나를 보기만 하면 팔이 부러질 듯 가늘고 몸이 약하다며 선생님 도시락을 내게 주시는가 하면, 운동할 때 배고프면 뭐라도 사 먹으라며 지폐를 손에 쥐여 주시기도 했다. 말괄량이 같은 내 성격과 맞지 않았던 가정시간에 가정 선생님은 늘 내 것을 샘플로 만들어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그 선생님들 모두가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고마운 분들이다.

엄마, 나도 서울 가서 공부할래요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느라 친구들이 한참 부산을 떨 때 나는 원서 쓰는 일보다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정신없었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겠다, 서울에서도 경기여고를 가겠다고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빠가 서울대 상대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서울로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오빠는 고등학교 재학 당시 서울대 주최 전국영어경시대회에서 2등, 전국 수학학력대회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오빠는 미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원래 오빠는 서울대 미대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완고하신 할아버지 반대가 단호하셨다.

“우암 송씨 양반집에서 환쟁이가 웬 말이냐?”

온 집안이 난리가 나는 바람에 오빠는 어쩔 수 없이 미대를 포기하고 서울대 상대로 진로를 바꿔야 했다. 그 시기에 가끔 오빠 때문에 어머니가 서울에 다녀오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마음 아파하셨다. 과거 할머니 댁에서 피난살이 할 때 싸우며 내 뺨을 할퀴었던 막내 고모의 딸인 사촌들을 보고 오시면서다. 당시 사촌들은 경기여중·고를 다녔는데, 고모가 딸들에게 밥은 작은 공기에 조금만 주고, 주로 사과 등 과일을 많이 먹이면서 정성껏 공부 뒷바라지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밥도 변변히 먹이지 못한다며 자책을 하셨다. 밥만 배불리 먹이는 것만도 큰일이었던 어머니에게 그런 광경은 아마 꿈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사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고등학교는 경기여고를 가야겠다고

혼자 마음을 먹었고,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쓸 시기가 되어 어머니께 속마음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계집애가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면 못쓴다. 오빠는 남자니까 괜찮지만 너는 여자라서 절대로 집을 떠나 혼자 지낼 수는 없다.”

나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엄마한테 떼를 쓰다시피 내 뜻을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도 완강했다.

“오빠가 서울에 있다고는 하지만 오빠가 남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있어서 너는 혼자 자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절대 안 된다.”

나는 울면서 고집을 부렸다. 그 사이 며칠이 지나 어느새 대전여고 원서 마감날이었다. 이러다가는 대전여고도 놓쳐서 못 가고 중학교 졸업으로 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신없이 교무실로 뛰어갔다. 그러잖아도 선생님께서는 수차례 빨리 대전여고 원서를 쓰라고 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뛰어간 것이다.

서울 그리고 경기여고의 꿈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등을 다독여주셨다.

“대전여고는 충남의 경기여고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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