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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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6)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7.27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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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것질이라고는 고구마, 감자 그리고 누룽지 먹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 누룽지라도 뭉쳐서 가져오는 날이면 모두가 그 아이에게 몰려 가 서로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외면하고 자리를 비켰다. 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 때문이었다.

“양반은 먹을 상을 밝히면 안 된다. 식사 때는 남의 집엘 가서도 안 되고 만약 가 있다가도 식사 때가 되면 바로 나와야 한다. 남이 먹을 것을 갖고 있으면 쳐다보지도 말고 절대로 얻어 먹어서도 안 되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

할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던 말씀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각자가 싸 온 도시락을 교실 가운데에 피워놓은 조개탄 난로 위에 차 곡차곡 쌓아놓고 데워먹었다. 자칫 넘어질 듯 높게 쌓아놓은 도시락 중 그날 재수 없게 맨 밑에 놓인 도시락은 새까맣게 타서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리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난로 위 도시락의 밥과 김치가 타는 냄새로 진동하면 그 냄새로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입맛을 다셨다. 

도시락 반찬이라야 대부분이 김치, 노란 무, 새우젓, 장아찌, 고추장이었고 잘하면 콩자반과 멸치볶음이 고작이었다. 반에서 잘 사는 친구 한 두 명이 달걀프라이나 장조림을 싸 오면 안 보는 척하며 부러워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꽁보리밥이거나 도시락 반찬이 너무 형편없으면 창피해서 같이 먹지 않고 책을 펴서 가림막으로 가리고 혼자 숙이고 숨어 먹는 아이도 있었고 그마저도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못되어 굶는 아이는 무슨 볼일이 있는 척하고 슬쩍 밖으로 나갔다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들어오기도 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우리는 서로 그런 상황을 빤히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오버코트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구경해 본 적도 없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정해준 겨울 외투는 홑겹 무명천으로 만든 엉덩이에 내려올 정도 길이의 옷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와 빠리’라고 불렀다. 내의도 변변찮고 스웨터 하나도 제대로 없는 시대에 우리는 그 추위를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 남아야 했다. 

연필 한 자루를 사면 빨리 닳을까 싶어 일부러 연필촉을 뭉툭하게 깎아 사용했다. 다 써서 몽당연필이 되면 그 몽당연필에 깍지를 씌워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가 될 때까지 썼다. 그러다 보니 필통을 열어보면 몽당연필만 올망졸망 들어 있었다. 필통에 몽당연필의 키 순서로 나란히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나는 장마철이 가장 싫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6·25 전쟁 때 폭격을 받아 기와집 몇 채 빼고는 대부분이 판잣집이었다. 어머니가 처음 대전으로 나와 셋집을 얻어 살다가 그나마 마련한 우리 집 역시 조그만 판잣집이었다. 부엌 달린 방 한 칸이 전부였지만 우리 집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당시 화장실은 대부분 공중화장실을 사용했고 밤에는 요강을 사용했다. 목욕은 동네에 하나뿐인 공중탕에서 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목욕탕엘 갔다. 공중화장실에서든 공중목욕탕에서든 공중도덕이란 개념은 찾아보기 어려운 그때 명절을 앞두고 엄마 손에 이끌려간 목욕탕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을 만큼 북새통이었다. 

여름 에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냇가로 나가 함께 목욕했다. 냇가 중간을 중심으로 위쪽 냇물은 남탕, 아래쪽 냇물은 여탕으로 목욕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장마철을 싫어했다. 평소 멀쩡하던 우리 집이 비만 오면 여기저기 새서 천정과 방바닥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도 빗소리만 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불안해져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수업을 마치고 만사 제치고 집으로 달려가 나는 엄마를 도와 새는 곳 아래에 크고 작은 양재기를 여기저기 받쳐 놓는 것이 일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그릇이 올망졸망 총동원되었다. 새는 천정을 보아가며 그 밑에 대어놓고 그릇이 차면 얼른 버리고 재빨리 그 자리에 놓아야 했다. 

철부지 어릴 적엔 한편으론 재미도 있었다. 양재기에 떨어지는 빗물이 튀게 되면 방바닥 장판은 뜨고, 그런 날이면 이불을 펴지도 못했다. 금방 빗물에 이불이 젖기 때문이다. 때로는 방만 젖는 것이 아니라 큰물이 지나가면서 물이 부엌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럴 때는 모든 식구가 대야를 들고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네에서 그렇지 않은 집이 드물었다.

사는데 필요한 어떤 것도 우리에게 풍족한 적이 없었다. 돈이든 먹을 것이든 입을 것이든 어떤 것 한가지라도 걱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전쟁 후의 가난한 생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때 내가 할 일은 공부였고 유일하게 공부를 통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었다. 

우리 4남매 자식은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었고 또 삶의 의미였다. 우리는 모두 사실 그것을 잘 알기에 1등을 함으로써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아마도 그때 우리 가족은 이미 ‘희망 은 우리 삶에서 공짜로 누리는 제일 멋진 축복’이라는 장영희 교수의 말을 터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미래에 닥칠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내는 강인함과 단단함의 가치로 보다 여유있는 삶을 위해 인생 공부를 한 소중한 시기였던 것 같다. 오죽하면 그때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가 ‘진지 잡수셨어요?’였을까?

국내 최고의 북유럽식 간호 교육기관–NMC 입학

1967년 당시 국내 4년제 간호학과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서울대, 연대, 이대, 가톨릭대 등 4개 대학뿐이었고 부산대, 경북대, 전북대, 전남대 등 모든 국립대학을 비롯해 전국의 사립대학교의 간호학 과는 3년제이던 시절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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