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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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7)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8.05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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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학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로서는 4년제와 3년제의 차이는 모르고 그저 1년을 덜 다니고 똑같은 간호사 면허증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담임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친 채 NMC 입학원서를 쓰고 대전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국립중앙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을 찾 아 ‘School of Nursing’이라고 적힌 학교 건물에서 시험을 치렀다.

당시 정원 35명 모집에 경쟁률은 28:1이었다. 영어, 수학, 국어 세 과목에 생물, 화학 중 선택이었는데 나는 화학을 선택했다. 특이하게도 키는 150cm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예상대로 합격하였다. 35명의 입학생 중 경기, 이화, 사대부고, 숙명, 진명여고가 약 22명이었고 나머지 12명은 경북, 부산, 경남, 전남, 전주, 청주여고 등 각 시도대표라고 우리가 자칭했다. 경기, 이화여고에서도 1, 2등 하던 친구들이었고 지방에서 온 친구들도 대부분이 전교 석차로 우수한 친구들이라 자존심이 강한 수재들이었다.

선배가 외국인 기숙사 같다던 좋은 기숙사에도 들어갔다. 나는 1층 첫 방에 배정되어 여섯 명이 함께 살게 되었다. 기숙사에서는 저녁 식사 후 난생처음 보는 전축을 틀어놓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듣던 대로 목욕탕에서는 뜨거운 물이 24시간 펑펑 나오고 실내에서는 반 팔, 반바지를 입고 있어도 더운 영화 같은 생활이었다. 조개탄 때는 교실만 보던 내가 보일러 시설 속에서 실내 목욕탕을 사용한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학교 강의실 역시 보일러 난방이 되어 조개탄이나 연탄없는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 NMC 간호학교는 간호계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간호대학이었고, 우리 학교에 강의 나오는 것을 외부 교수들은 명예롭게 생각했다. 교수진도 훌륭하여 외국인 교수를 비롯하여 서울대 이귀향 간호학과장, 이대 이영복 간호학과장 등 국내 최고의 교수들이 우리 학교에 출강하셨다. 그때 외부 교수들은 강의 도중 옷을 하나씩 벗으면서 말씀하셨다. 

“냉동실 같은 우리 학교에 있다가 NMC를 오면 다른 나라 온 것 같이 더워서 옷 좀 벗어야겠어요.”

NMC의 교육 시설은 북유럽 수준이었고 교육과정 역시 국내 어느 대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북유럽식의 블록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이론과 실습교육이 완벽하여 다른 대학들은 흉내도 낼 수 없었다. 30명 학생을 다시 내·외과반 (M-S Group), 산·소아과반(P-O Group)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론 수업을 듣고 곧바로 해당 병동에 나가 실습하는 시스템이었고, 모든 학생이 완전하게 수행 가능할 때까 지 임상 지도를 받았다. 학사관리도 철저하여 1학년 때 대학 낭만을 즐 긴다며 영화와 문학에 빠졌던 다섯 명의 친구들은 인정사정없이 1학년 첫 학기에 5명은 퇴학당했다. 그중 두 명이 우리 방 식구였다. 

구경도 못했던 좋은 기숙사와 우리나라 최고의 시설을 갖춘 NMC에서 거의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와 실습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첫 병동 실습을 나가서 만난 선배 간호사들이 얼마나 멋있고 하나같이 예뻤던지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실습이 계속되면서 내 마음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병동에서 실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이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환자의 침상 정리, 개인위생, 때로는 대소변돕기 등을 수행하면서 서서히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대소변기를 들고 복도에서 여자 인턴, 레지던트를 만나기라도 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나도 모르게 창고나 처치실로 몸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끊임없이 자문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잘했다는 말인가? 이건 아니야.” 간호학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게다가 학교 배지를 달고 밖에 나가면 아무도 우리 학교를 몰랐고 알아주지도 않았다. 정말로 우리 학교를 잘 아는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간호계와 일부 사람만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수재라고 알아주었을 뿐 그 외의 일반인들은 우리 학교를 거의 알지 못해 또 자존심의 상처를 받곤 했다. 그렇게 외부와 접촉하면서 4년제 대학과 3년제 대학의 차이를 차츰 깨달아갔다. 졸업 후 같은 간호사 면허증은 취득하지만 학사학위는 취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부터는 더욱 실망감이 컸다. 

1학년 때 이화여대에 입학한 친구들이 서울 공대 미팅에 함께 가자고 해서 마음이 들떠 예쁘게 꾸미고 나갔다. 그런데 이대 배지를 단 친구들은 학교를 금방 알아본 남학생들이 내게는 어느 학교냐고 물었다. 메디컬센터 간호학교가 어디 있느냐? 뭐하는 대학이냐는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줘야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알게 되는 대학을 내가 다니고 있다니! 서울대, 연대보다도 앞서 특차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외국대학 같다는 NMC를 모르다니! 그날 이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배지를 떼어버렸다. 차라리 어느 학교 배지냐고 묻는 사람이 없어 편했다. 그것이 내가 꿈꾸던 대학, 내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그 후 이른바 명 문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열등감마저 드는 내가 싫어졌다. 초·중·고 시절 1등을 하고 수석 합격을 했던 일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바보 같은 결정을 한 내가 싫었고 현실의 나 역시 바보 같아 우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일기장에만 눈물과 함께 나의 마음을 쏟아냈다. 그러나 자존심은 회복할 길이 없었다.

학교를 그만둘까? 그만두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기숙사를 나가면 나는 대전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매일 고민은 커 갔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백의의 천사라는 말 외에 간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한 나를 달콤하게 유혹했던 전액 국비 장학생, 기숙사 제공, 미국 취업 등의 조건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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