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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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0)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8.1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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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제독에 재 등용과 만언소(萬言疏)

늦은 봄 한낮의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평범한 베옷을 입은 조헌이 후율정사 뒤 능선에 있는 밭에서 하인들이 하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강론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에게는 지금이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때 어느 낯선 사람이 그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 조헌 선생이 사시는 집이 어디에 있소?”

허름한 차림으로 밭에서 일하는 그가 조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일부러 모퉁이를 돌아가는 먼 길을 가르쳐 주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노천에서 함부로 만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집으로 내려가서 몸을 씻고 의관을 정제한 후 손님을 기다렸다. 그가 바로 공주목교수겸제독속교관(公州牧敎授兼提督屬敎官)에 제수한다는 첩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1586년(선조 19년), 조헌의 나이 43세가 되는 해였다. 그는 관직생활에서 수차례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에 있었다. 이번에 임명된 주학제독관(州學提督官) 역시 향교의 교육 진흥을 위해서 각 목에 배치되는 신설된 직책이었다. 

공주 제독으로 재등용된 조헌은 또 상소를 준비한다. 그해 10월에 올린 변사무겸논학정소(辯師誣兼論學政疏)로 장문의 만언소이다. 만언소는 상소문의 글자가 1만 자를 넘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시세와 국정 전반에 있어서 제도의 개선, 시비의 구분, 시폐 등을 논하고 정치적 주장 등을 심도 있게 진언하는 것이다.

도학에서 경세사상은 학문과 정치가 일치되어야 한다. 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양을 성취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나아가 공익(公益)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권력의 원천은 곧 백성들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왕이 독재를 하거나 전횡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비는 어진 마음으로 나라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학정일치와 위민정신에 기초한 직언(直言)을 숭상하는 바였다.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와 고사(古事)에 풍부한 지식을 쌓은 조헌이었다. 그는 현실에 대한 직관 능력과 명철한 인식으로 직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대개가 주자(朱子)의 만언소를 모범으로 하여 여러 선비들이 이를 행하여 왔다. 그중에서도 기묘사화와 연산군 때 형성된 옳지 못한 규정과 습속의 개혁을 주장한 율곡의 만언봉사(萬言封事)가 유명하다. 

옳은 일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조헌의 성품이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많은 상소를 올렸다. 온전하게 전해오는 것만 13편이고 이외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까지 모두 합하면 이보다 많은 숫자가 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언소가 여섯 번이나 된다. 명나라를 다녀와서 올린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가 10,717자이고 의상십육조소(擬上十六條疏)가 17,759자이다. 그리고 공주 제독 때에 올린 변사무겸논학정소(辯師誣兼論學政疏)가 15,282자이고 공주 제독을 사임하면서 박순(朴淳)과 정철(鄭澈)을 변호하고 정여립(鄭汝立)과 이발(李潑)을 극력 논박하는 진소회잉사직소( 陳所懷仍辭職疏)가 13,226자이다. 1589년에 시폐의 척결과 동인들을 비판하는 논시폐소(論時弊疏)는 11,197자로 대궐 문 앞에서 도끼를 옆에 놓고 엎드려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이 상소로 인해 함경도 길주에 유배된다. 1591년 3월에는 왜 사신이 우리 조정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자 왜사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한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가 13,941자였다. 이 역시 옥천에서 도끼를 메고 상경하여 지부상소를 하였다.

조헌의 상소문 성격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하나는 경세제민의 방책을 진언한 상소이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을 경고하고 그 대비책을 제시한 상소이다. 그의 상소문은 10,000 자가 넘는 것이 무려 6편이고 그 외의 상소도 2,000 자 이상 5,000 자에 달한다. 이러한 상소문에는 조헌의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현실 인식, 학정일치와 위민정신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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