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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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9)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8.19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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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iend 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너에게 준 사랑을 내게 갚지 말고 누군가에게 똑같이 베풀어라.” Friend 씨가 서신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학에서 나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모두 11개 대학교에서 나를 전액장학생으로 받겠다는 편지였다. 워싱턴대학(Washington U.),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위스콘신대학(Wisconsin U.) 등 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느 대학이 좋은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미국 병원에서 오래 근무하다 온 선배 간호사와 상의했다. 그렇게 존스홉킨스대학교로 결정하고 Friend 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Friend 씨는 곧바로 내게 항공료 700불을 수표로 보내주었다. 나는 존스홉킨스대학에도 나를 전액 장학생으로 받아준다는 호의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나의 결정을 알렸다. 이렇게 미국에서 전보와 서신이 오가면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내가 수업하는 동안 전보를 교수에게 전달한 것이다. 당장 2학년 주임교수가 나를 불렀다.

“유학 가려는 것이 사실이냐? 우리 학교 학생회장과 전국 간호대학 학생회 부회장까지 되어놓고 그 책임을 어찌하려고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냐?”

난감했다. 유학 가려 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둘러댈 말도 없었다. 또 주임교수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 2학년 말인데 1년 후면 졸업이니 일단 졸업하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면 나중에 한국에 오더라도 졸업한 전적 대학을 가질 수 있는데 아니면 자퇴가 되지 않겠냐?”

마음이 동했다. 후회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만일 내가 자퇴하고 미국 유학을 가면 주임교수 말대로 1년 더 다니고 졸업해서 모교를 가질 걸 하는 후회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 유학 가서 박사를 받더라도 절대 나의 능력과 성취를 미국에 남아 미국을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한국에 돌아와 나름 기여하겠다는 소신이 있었다. 고민은 컸지만 졸업을 1년 앞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결국 유학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나는 Friend씨와 존스홉킨스대학에 NMC를 졸업한 1년 후에 유학하겠다는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Friend 씨께는 700불을 다시 송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Friend 씨는 700불을 보내지 말고 예금해 두었다가 미국 올 때 사용하라고 했고 나는 그 돈을 은행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유학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연좌제로 인해 여권 발급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끝내 유학의 꿈은 접고 말았다.

이후 내가 결혼하고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는 Friend 씨를 초청하고자 했다. 먼저 우편으로 항공권을 보내드릴테니 꼭 한번 그리워하는 한국을 방문하실 것을 권했다. 얼마 후 Friend 씨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이제 늙었으니 그 큰돈을 들여서 내가 여행을 갈 것이 아니라 젊은 네가 그 돈으로 미국으로 여행을 와서 견문과 지식을 넓히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니 네가 오도록 해라.” 마지막까지도 서양의 아버지는 동양의 딸을 그토록 사랑했다. 그 편지를 읽고 한없는 고마움에 가슴이 저렸다. 

국립극장에서 영나이팅게일 음악회 공연

나는 성격적으로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영나이팅게일 음악회’ 역시 내 성격대로 기획, 추진했고 완벽한 공연으로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다. ‘영나이팅게일 음악회’ 는 대한간호학생회가 주관하는 가장 큰 행사로 간호 학생의 정체성과 품격을 모두에게 알리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음악회를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동시에 학생회의 재정을 고려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홍보할 방법을 찾았다. 그중 한 가지가 오빠에게 공짜로 부탁한 포스터였다. 오빠는 서울대 상대를 다닐 때 이화여대 개교 100주년 기념 단과대학별 행사에서 이화여대 학생회장의 부탁을 받고 무대장치와 포스터 등을 맡아 큰 호평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오빠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물론 오빠가 그려준 포스터는 멋졌고 학생회 임원 모두가 흡족해했다.

그런데 인쇄에 들어가자니 음악회 공연 장소가 영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대학생 행사이긴 하지만 대학 강당에서의 공연은 음악회 수준을 말하는 것 같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는 우리 음악회가 우리나라 최고 공연장인 국립극장에서 열리면 얼마나 근사할까 생각했다. 최고의 국립극장과 비교하니 강당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당시 우리 나라 최고의 공연 장소는 오로지 명동의 국립극장 하나뿐이었고 국립 극장은 이미 공연계획이 꽉 차 있어 우리 같은 아마추어 학생 행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일단 부딪쳐볼 생각으로 국립극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난생처음 국립극장을 찾아 비서실로 가니 비서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사무총장님하고 약속이 되어있는데요.”

무턱대고 찾아갔으니 그렇게 둘러대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비서는 더는 묻지 않고 나를 사무총장실로 안내했다. 

“총장님 제가 급해서 밖의 비서한테는 총장님하고 약속이 되어있다고 말하고 들어왔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나는 처음 만난 사무총장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나를 소개했다. 그러자 총장님은 크게 웃더니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간호학생회의 정체성과 우리 음악회를 개최하는 목적을 설명하고 공부하는 간호 학생들이 열과 성을 다해 간호 정신을 알리기 위해 준비한 음악회를 멋진 장소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간절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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