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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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8.26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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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꼭 국립극장에서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총장님도 쉽게 스케줄을 바꿔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 답변은 나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국립극장은 일 년 전부터 프로그램이 꽉 차 있어서 도저히 어려워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 음악회 같은 특별한 학생 행사를 국립극장에서 열게 해주는 것이 말 그대로 국립(國立)의 취지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개인의 연주회나 공연과는 견줄 수 없이 중요한 행사입니다. 우리 음악회를 개최하도록 도와주시면 우리 간호학생회로서는 영광이고 전국의 간호대학 학생들로부터 감사와 칭송이 넘쳐날 겁니다.”

내 얘기를 경청하고 계시던 사무총장님이 그때 놀라운 결정을 해주셨다. 우리 음악회 공연 날짜에 잡혀있던 2시 독창회 프로그램을 빼고 우리 음악회를 넣어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찾아왔는데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고 흥분되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저절로 나왔다. 지성이면 감천으로 꿈같은 일을 이루어낸 것 이다. 총장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학생이 자기 개인 행사도 아닌 학생회 행사를 잘하기 위해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진심으로 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마음에 내가 그만 졌네.”

그 순간 그 총장님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해결할 문제는 인쇄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전국 대학에 돌릴 많은 부수를 제작하자니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오빠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오빠의 대학 선배가 출판사를 하고 있다며 소개해 주었다. 출판사는 을지로 3가에 있었다. 덕분에 원가 수준으로 싸게 포스터를 인쇄할 수 있었다. 포스터 게시는 임원들에게 맡기고 전국 대학 학생회에도 보내 모든 대학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부탁했다. 음악회는 장소 이름값 때문에라도 성공해야 했다. 합창단은 편의상 서울 소재 대학의 학생들로 구성했고 독창으로는 우리 학교 노은주가 ‘보리밭’을 부르기로 했다. 지휘자는 우리 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던 윤치호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당시 윤치호 선생님은 국내에서 성악가로 유명한 분이었다.

‘영나이팅게일 음악회’라는 특수성을 살려 나이팅게일이 횃불을 들고 첫 무대에 등장하는 순서가 있었다. 의상은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Crimean War) 때 입었던 유럽풍의 우아한 드레스였는데 당시 미국에서 옷을 가져오신 강윤희 교수만 그 옷을 소장하고 있어 빌려 입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맞춰온 옷의 사이즈가 문제였다. 결국, 그 옷이 맞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하여 내가 그 꿈의 드레스를 입고 그날 나이팅게일로 등장하는 영광도 안았다. 첫 무대의 장을 여는 주인공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공연 날, 국립극장은 모든 좌석이 가득 차서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인산인해의 성황을 이루었다. 간호학생회로서는 상상도 못한 국립극장에서의 꿈같은 멋진 음악회였다. 그날 참석했던 교수님들도, 학생들도 모두 놀라고 만족했다. 그날 우리 음악회에는 KBS에서도 나와 취재했다. 그렇게 우리 학생회가 주관한 행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우리 임원들은 그날 저녁 맥주를 마시며 성취감을 만끽했다.

KBS 대담프로 출연

대한간호학생회의 유례없는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은 한 동안 간호계의 화제이기도 했다. 그날의 공연을 촬영한 KBS로부터 다음날 내게 연락이 왔다. 어제 공연한 나이팅게일 음악회에 관해 듣고 싶으니 KBS 대담프로에 출연해 달라는 오○○ PD의 전화였다. 나는 우리 간호학생회의 활동과 간호의 의미를 국민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회장인 내가 나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오 PD에게 부회장인 내가 출연하기보다는 회장이 인터뷰하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자 오 PD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출연을 요청하는 사람은 송지호 학생이에요.”

그래도 일단 보류하고 박가실 회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박 회장은 주저없이 말했다.

“그건 당연히 미스 송이 출연해야지. 모든 행사를 주관한 본인이 행사 내용과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아? 나는 회장이라는 타이틀 뿐 한 것이 없는데 내가 나가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어?”

자기를 내려놓고 웃으면서 주저하지 않고 그리 말해주는 박 회장이 존경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회장과 부회장으로서가 아닌 진심으로 상대의 장점을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선후배인 동시에 친구였다.

박 회장의 양해로 내가 KBS 20분 대담프로에 출연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나운서의 질문 뿐 아니라 내가 간호 학생으로서의 자존감과 위상을 제대로 국민에게 인식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날 출연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방송국과 우리 간호계에서 나왔다.

대한간호학생회 임원들은 공적인 업무에서도 완벽한 한 팀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무척 가까워서 서로 돕고 배려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박 회장과 나는 각각 결혼한 후에도 자주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박 회장이 LA로 이민 간 후에도 내가 미국에 갈 때면 LA에 들러 식사하며 옛이야기로 우정을 나눴다. 총무였던 연세대 장정자도 미국으로 이민 갔고, 이화여대 백애영은 이화여대 조교로 있다가 주부로 들어앉았다. 서울대 박성애는 서울대 교수로 남아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가까운 교수로서 누구보다도 나를 인정하는 동료 교수이자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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