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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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33)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9.0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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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죽이나 정사(政事)로 죽이나 살인은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의 전국 통일과 침략야욕
    
조헌이 공주 제독을 사임하고 옥천 향리로 돌아왔다. 다시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강학하는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화창한 날씨에 한가로운 어느 날이었다. 이생(李生) 종철(宗喆)과 냇가를 산책할 때에 생원 김대승(金大升)과 훈도 주헌민(周獻民)이 술을 들고 찾아왔다. 가을 정취가 넘치는 냇가에서 기쁘게 취하고 시를 지으며 함께 즐겼다.

水麗山明地 물 좋고 산 밝은 땅
風高葉落秋 바람 일고 잎이 지는 가을
徜洋提督趙 배회하는 조제독(趙提督)
邂逅廣問周 주광문(周廣文)과 해후 했네
幸値仙翁集 다행히 신선들이 모인 때에
因攜童子遊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悠然成一醉 한가로이 다 함께 한껏 취하여
乘月步長州 달빛 타고 강가의 모래톱을 거니네
 ※廣文: 훈도의 다른 이름
 
1587년(선조 20년) 9월에 왜국의 사신 귤강광(橘康廣)이 입국했다. 귤강광(橘康廣)이란 자는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의 가신이었다. 예로부터 일본 사신을 맞이할 때에는 군읍(郡邑)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창을 들고 연도에 늘어서서 군대의 위엄을 보였다. 사신으로 온 귤강광(橘康廣)이 인동(仁同, 성주)을 지나다가 창을 잡고 서 있는 사람들을 흘겨보고는 “너희가 가진 창의 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비웃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열어 접대를 했다. 술이 얼큰해지자 귤강광이 잔치판에 후추를 흩어놓았는데 기생과 악공들이 그것을 줍기 위해 서로 다투는 바람에 잔치판이 어지러워졌다. 그가 숙소로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웃었다. 

당시 일본의 정세는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전국을 통일한 시기였다. 15세기 중엽에 일본을 지배하던 무로마치(室町)막부가 약화 되면서 지방 봉건영주들의 분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무로마치 정권이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년 간에 걸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계속되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실권을 장악하고 전국 통일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1582년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이에 오다의 부장이었던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아케치를 응징하고 1585년에 간바쿠(關白)가 되고 이듬해에 태정 대신(太政大臣)이 되어 천황의 권위를 빌어 전국을 통치하는 실권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빈약한 농민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한 그는 전통적인 가신(家臣) 집단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권력기반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취약점을 해외 원정으로 해소하려고 했다. 그동안 전국시대의 혼란이 평정되기 전까지는 조선과의 접촉에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권을 잡게 되자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여 동아시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엄청난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명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대륙을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겠다고 호언하면서 그 망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이 대마도주를 불렀다. 그는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에게 조선 국왕을 일본에 ‘입조’ 시키라는 터무니없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조선과의 무역을 주요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던 대마도로서는 조선과의 평화유지가 중요했다. 대마도주는 조선 측에 풍신수길의 요구를 은폐하고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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