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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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1)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9.02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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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쏟은 편지로 대박 난 크리스마스 페스티벌

NMC는 매년 X-mas가 되면 축제를 여는 전통이 있었다. 북유럽풍의 의상과 각자 최고의 멋진 장식품으로 멋을 낸 전교생이 음악에 맞춰 댄싱파티를 했다. 그 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선물 보따리를 둘러멘 산타가 2층에서 8층 병동까지 돌면서 환자들에게 “Merry X-mas & Happy New Year!” 하며 선물을 주었다. 그 행사를 앞두고 학생회장인 나는 우선 어떻게 하면 멋지고 환상적인 X-mas 축제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학생회비만으로는 내가 구상하는 멋진 축제는 어림없었다. 

며칠 궁리 끝에 나는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 병원 의사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병원 의사들을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협조 요청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각 해낸 것이 먼저 특진위원장을 찾아 협조 요청을 하기로 했다. 특진위원장이 특진위원회에서 각 과의 과장과 전문의들을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쉽게 찬조금을 걷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나는 먼저 특진위 원장을 맡고 계신 내과과장 김종설 박사님께 손편지를 쓰기로 했다. 찾아가서 말로 하는 것보다는 정성 들여 쓴 편지로 호소하는 것이 마음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편지를 읽고 설마 거절하겠는가 하는 자신감이 앞섰다. 

나는 특진위원장을 비롯한 각과 과장에게 전달할 편지를 정성을 다해 썼다. 편지를 쓰다 보니 새벽녘이었고 코피까지 쏟고 말았다. 솜을 뭉쳐 코피를 틀어막고 마지막까지 14통을 다 쓴 후에야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나는 부회장과 같이 특진위원장실을 찾아 김 과장님께 편지를 드리고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말씀드렸다. 사람 좋고 언변 좋은 젠틀맨으로 소문난 김 과장님은 웃으며 편지를 받아 읽으시더니 나를 쳐다보셨다.

“이 편지 필경사가 쓴 거야?”

“아니요, 제가 밤새워 쓴 편지인데요.”

“미스 송이 이걸 직접 썼다고? 마치 필경사가 쓴 것처럼 잘 쓴 글씨 인데….”

깜짝 놀라시며 편지를 읽으셨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무 잘 쓴 글에 감동해서 거절을 도저히 못 하겠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특진위원회에서 위원장님의 권위로 과장님들은 오천 원, 스태프 닥터들은 삼천 원씩 이번 달 월급에서 기부하라고 설득해주세요. 그럼 제가 월급날 서무과에 가서 받을게요.”

그 당시에는 월급봉투에 현금을 세서 넣어주던 시대였다. 염치를 무릅쓰고 찬조금액과 기부방법까지 일사천리로 말씀드렸더니 과장님은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드디어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월급날이 되자 나는 서무과로 가서 의사들의 월급봉투에서 직접 찬조금을 떼었다. 당시 간호사 월급이 만오천 원 남짓이었으니 오천 원은 큰돈이었다. 그 큰돈을 찬조금으로 받아낸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간호 학생이 병원 의사들의 월급봉투에서 뗀다는 것을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덕분에 근사한 댄싱파티와 저녁 식사 그리고 음악회까지 지금껏 보지 못한 성공적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을 열 수 있었다. 그렇게 멋진 행사를 마치고도 찬조금이 남아 학생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다음 회장단에게 18만 원을 넘겨주고 행사를 위해 수고한 학생회 임원들에게 만년필을 하나씩 선물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멋진 김종설 박사님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대성공한 간호학생 무의촌 의료봉사

대한간호학생회에서 또 하나 유례없는 무의촌 의료봉사 계획을 세웠다. 우선 장소를 강원도의 산골 거두2리로 정하고 의료활동에 필요한 약품과 치료기구들을 섭외하기로 했다. 나는 먼저 국립의료원 원장실을 찾아가 우리 간호학생회의 뜻과 봉사 정신을 헤아려주시고 우리가 필요한 의약품과 치료용 물품들을 지원해줄 것을 부탁드렸다.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던 윤유선 원장님께서는 주저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는 약과 물품 리스트를 주면 약국과 중앙 공급실에 지시해 놓겠다고 하셨다.

나는 우선 가난한 산간벽지 주민들임을 고려하여 NMC의 대표브랜드인 B콤플렉스를 비롯한 비타민류 그리고 상비약인 설사약, 소화제, 항생제, 상처 치료에 필요한 소독약과 거즈, 장갑, 핀셋 등 각종 의약품과 기구를 요청하여 확보했다. 그리고 이어서 연세대 총무와 함께 연세의료원장, 가톨릭의료원장을 만나 똑같은 지원을 요청했고 그 원장님들 역시 필요한 만큼 지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다. 이로써 의약품은 생 각한 것보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시골 산골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의약품 못지않게 생필품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적십자사 구호 물품을 떠올렸다. 나는 곧바로 적십자사를 찾아가서 우리 간호학생회의 무의촌 봉사활동에 관해 설명했다. 의약품을 여러 병원에서 지원했듯이 적십자사에서도 생활용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고 내 요구는 승인을 받았다. 그 후 학교에 도착한 물품은 큰 드럼통 2개 분량이나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양이었다.

드디어 의료봉사 출발일이 되어 임원들이 NMC에 모였다. 그동안 지원받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의약품과 구호 물품들을 보고 임원들의 입은 딱 벌어졌다. 문제는 이 산더미같이 많은 물품을 어떻게 강원도까지 운반하느냐였다. 여학생들로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난제였다. 그래도 서울역까지는 소형트럭으로 실어 옮겨 광장에 쌓아놓았다. 하지만 이후부터가 고민이었다. 서울역에서 어떻게 기차까지 실어 이동시키며, 그 운임은 어떻게 감당할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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