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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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3)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9.30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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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다음 날 근무 후에 외출했다가 일부러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또 사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역시 간호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또다시 늦은 시간에 간호과에 들렀고 감독님들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며 나의 확답을 요구하셨다. 

사실 이미 거절은 했지만 인간적인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순한 과장님으로부터 나는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졸업선물로 금귀걸이까지 챙겨주실 만큼 관심과 애정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었다. 그런 유 간호과장님의 억울한 전보 발령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 때에 내게 다시 확답을 달라고 하신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확답을 드렸다. “제가 나서서 시작해보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상 대충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심사숙고한 후 시작해야 우리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우리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선 국립병원의 공무원 신분인 간호사들이 시위를 한다면 거기에 는 분명한 명분과 타당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간호과장을 타 기관으로 인사발령을 냈다는 이유만으로는 시위할 명분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보다 큰 현실적인 명분을 내걸기로 했다. 바로 간호사 대우의 부당성이었다. 그 당시 대학을 졸업하면 간호사의 첫 직급은 ‘5급을’(지금의 9급 공무원)이었는데 그 직급을 ‘5급갑’(8급)으로 승급을 요구하기로 했다. 

나는 우선 300명이 넘는 간호사들에게 기숙사 방 열쇠를 내게 반납하고 일제히 병원을 나가도록 했다. 간호부 과장님은 간호사들에게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즉, 상부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간호과 감독들이 언론에 나가서 하는 얘기는 따르지 말고 오로지 송지호의 지시만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언론 인터뷰는 창구를 나로 단일화하기로 했다. 

일시에 기숙사는 텅 비었고 응접실엔 열쇠가 쌓였다. 문제는 입원환자들에 대한 책임이었는데 나는 각 병동 인턴들은 투약과 주사, 기본 간호는 학생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간호사가 없는 병원은 상상할 수가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에 차윤근 원장님께서 당장 나를 만나자는 연락을 해오셨다. 

“빨리 시위를 멈추어 주게”

원장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시작한 시위를 그냥 중단할 수는 없었다. 시위하는 중에 수많은 언론이 카메라를 들고 몰려와 나를 찾았다. 물론 나는 인터뷰를 피하지 않고 간호사들의 열악한 대우를 설명하고 설득했다. 

“약자인 여성들만의 전문직인 간호사들은 오직 희생과 봉사라는 명분 아래 환자 곁을 지키며 야간근무와 저녁번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직업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20대 초반의 간호사가 기자님들의 여동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힘들고 열악한 근무조건과 대우를 받고 근무하는 것에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병원을 비운 간호사들만 비난받고 지탄받아야 할 일인가요?”

나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간호사들의 현실을 알리고 호 소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다행히 다음날 언론에 나온 기사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나는 기자들에게 병원을 비우고 나간 간호사들의 의무와 책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약자인 여성 집단이 오랫동안 감내해 온 무제한의 의무와 희생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간호사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내 인터뷰는 성공적이었고 대부분 매스컴은 약자인 우리 간호사의 우군이 되어 작금의 현실을 시정해야 한다고 나갔다.

한편, 병원에서는 차윤근 원장 뿐 아니라 안병훈 의료부장님이 나서 서 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보건복지부 장관을 통해 관철할 것이니 시위를 끝내 달라고 호소하셨다. 당시 작은아버지 댁에 올라와 사시던 할머니는 안기부로부터 손녀딸을 자제시키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인 간호사들이 집단으로 병원을 비우고 시위한 일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위 5일째 되는 날, 원장님과 의료부장님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간호사 직급을 5급 을에서 5급 갑으로 승급하기로 부처와 협의가 끝났다며 이제 간호사들을 들어오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간호사들을 들어오게 하는 조건으로 전체 간호사 앞에서 그 말씀을 분명하게 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날 늦은 밤, 나는 TBC 방송에 출연하여 전국 각지에 나가 있는 NMC 간호사들에게 즉시 귀원을 당부했다. 

다음날 간호사들은 병원으로 돌아왔고 차 원장님으로부터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은 승급된 5급 갑에서 시작한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았다. 병원은 그 다음 날 정상화되었다. 일찍이 간호 역사에 이런 변곡점을 거쳤기에 현재 간호사들이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을 8급(5갑)으로 받게 된 것이다. 처음 의도한 간호과장님의 전보 발령은 장관의 인사권에 관한 문제 제기였기에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 간호사들로서는 유순한 과장님을 잃는 상실감도 겪어내야 했다. 그렇게 상처를 남기고 비록 과장님은 떠나셨지만 나는 내가 세운 목표가 간호사 전체의 위상 제고를 위한 큰 과제였기에, 그 목표를 달성한 것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이 말할 나위 없이 컸다. 

그 후 내가 근무하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날 수술은 부인과 환자로 산부인과 박찬무 과장님이 집도하는 수술이었다. 박 과장님은 내게 시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간호과 수퍼바이저들이 사무관 이상이라 자기들 해고당할까 무서워서 어린 미스 송을 이용해 시위하게 만든 것아니냐”고 하셨다. 나로서는 듣기 거북한 말이었다. 간호과 감독들을 그렇게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이 우선 마음에 걸렸고, 또 비록 내가 어리기는 했지만 나를 그렇게 수단으로 이용이나 당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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