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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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 이종구 수필가
  • 승인 2021.10.0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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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다. 10월이 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잘난 체 뻐기는 듯한 마음이 든다.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파란 하늘, 오색 찬란한 산야의 색깔 그리고 누래진 들판을 보며 대 자연 속의 ‘나’라는 존재를 다시 실감하며 목에 힘을 주어 본다.

우리 삶의 기초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존재는 인정되며 삶이 시작된다. 아이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며 듣는 첫 번째 소리, 그것은 ‘나왔어 = 나, 왔어’ 이다. ‘나’가 온 것이다. 개체 존재의 등장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인가 보다. 

‘나’라는 우주 속의 확실한 존재감, 이것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다. 그러기에 온 가족이, 온 마을이 생명 탄생을 축하하고 대문에는 금줄을 걸어 온 세상에 알린다.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철학적인 존재론을 떠나 가족의 존재를 일깨우는 생활을 살펴본다. 존재의 구체적 실체는 이름으로 대치된다. 이름의 어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보니 이는 이(齒)가 아닐까? 그래서 신라시대 왕은 이사금으로 불렸다. 이사금<잇금<임금의 변화처럼 이는 齒이다. ‘∼름’은 누르스름하다, 늠름하다 처럼 근사한 모양을 나타낸다. 이름은 잇금과 같다는 말로 개별 존재의 확인이다. 이(잇금)가 다르다는 말이다. 

영어의 name은 na(∼보다도)와 me를 합한 말이 아닐까?  나보다 나를 대신하는 것, 즉 이름이다.  한자의 姓名은 女(어머니)가 낳은(生) 존재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夕)에 살아 있는 개체(口)를 확인하는 대상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이름은 존재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얼마나 자녀들의 존재감을 일깨우고 있을까? 모처럼의 가족 외식에 앞서 “너희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까?”하고 묻고는 아이들의 의견은 어느새 무시되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주장에 음식이 선택되지는 않는가? 철이 바뀌면 옷을 사준다고 백화점에 가서 아이들 보고 “네 마음에 드는 것 골라 봐” 하고는 어느새 아이가 고른 옷은 무시되고 어머니 선택에 의해 옷을 구입하지는 않는가? 아이들은 속으로 말한다. ‘분명히 나보고 고르라고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살거야’라고. 그래서 다음부터는 형식적으로 고르는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비평하는 어른들의 이중적 판단 기준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는 일, 그것이 화목한 가정의 기초이다. 수련회를 가고 친척집에 가서 2~3일 자고 오는 경우,  대개의 어머니들은 “잘 잤니?”, “밥은 잘 먹고?” 등 불필요한 질문으로 아이들을 귀찮게 한다. 그런 허접스런 질문보다는 현관에 들어서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네가 없는 어젯밤은 엄마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는지 몰라. 역시 너는 우리 집의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해보자.  그 아이는 가족 구성원의 한 존재로서 그 자긍심과 존재감이 충만하여 당당하고 멋진 자녀로 자라갈 것이다.  물리적인 존재보다는 정신적인 존재로서의 실체를 인식시키는 것, 그것이 행복한 가정의 첫걸음이 아닐까? 

10월, 이 좋은 계절에 가족 모두들을 확인하고 존재를 부각시키는 나들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Covid19로 찌들고 움추렸던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릴 수 있는 우주 속의 ‘나’를  자신있게 나타내는 호연지기를 길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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