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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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5)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21.10.1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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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나는 간호과장이 아닌데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직원도 당황해서 봉투에 적혀있는 간호과장을 지우면서 “어쩐지 간호과장님이 왜 이렇게 어린가 하고 이상했어요.” 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참석자들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병원에서는 간호과장이 참석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회의에 참석한 대가로 돈 봉투를 받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속기로 참석했던 기자가 잠깐 신문사에 들렀다 가라고 해서 사회부에 들렀다. 그 기자는 당시 김천수 사회부장한테 오늘 심포지엄에서 내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누구보다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발간된 신문을 보니 1면에 실린 심포지엄 기사 중 1/5 정도는 내가 발언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를 뽑아만 주면 귀교를 빛내겠습니다

NMC를 졸업하고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간호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누를 수 없는 열망이 나를 괴롭혔다. 3년제 간호대학을 졸업한 탓에 대학원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랬다. 학벌로 먹고 살고 학벌이 중요한 대한민국에서 먼저 졸업하여 먼저 취직할 수 있는 3년제가 낫다고 생각했던 철부지였다. 대학에 편입학하려 해도 예비고사 성적이 없어서 불가하다고 했다. 나는 예비고사 전해에 졸업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NMC에서 가장 가까운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를 무 조건 찾아갔다. 물어물어 교무처장실로 갔더니 조교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나는 긴히 교무처장님을 뵐 일이 있다고 하고 처장 실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나에 게 교무처장은 내게 ‘무슨 용무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소개부터 하고 나서 말했다.

“처장님 저를 성균관대학교에 편입학자로 뽑아만 주시면 반드시 성균관대학교를 빛내겠습니다.”

그러자 처장님은 당돌하리만치 똑부러진 한 마디에 조금은 놀라는 듯하면서도 기특한 마음이 들었는지 쾌히 승낙했다. 뜻밖이었다.

“내가 가능하면 편입학을 받아줄 테니까 NMC 졸업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가져와 보세요.” 

나는 기쁜 마음에 당장 NMC 졸업, 성적증명서를 떼다 교무처장에게 제출했고 일주일 후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기다렸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이 되어 다시 성균관대 교무처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처장님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학생이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높이 사고 또 공부도 잘해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꼭 우리 대학교에 받고 싶었다. 그런데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학점인정을 하려고 해보니 우리 대학에 간호학과가 없어서 동일 교과목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학점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시 말해서 산, 소아과, 기본 내과, 외과, 간호학, 생리학, 병리학 등 의학 관련 교과목을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교과목들이 우리 학교에는 전혀 개설되어있지 않아서 학점인정을 해줄 수가 없으니 편입학이 불가능하다. 나 개인으로서는 학생을 꼭 받아보려고 연구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돈 내고 공부하려고 해도 더는 공부할 수가 없다니 뭐 이런 세상이 있나 싶어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교무처장실을 나와 천천히 걸어 나오며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공채시험 수석 합격

간호에 애착을 갖지 못한 채 병원 근무를 한 지 1년이 지난 즈음 밤대기(on call) 근무를 하고 아침에 기숙사 방에 들어와 여느때처럼 신문을 집어 들고 앉았다. 그때 한국일보 전면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공채'

KAL 창사 이후 처음으로 시행하는 스튜어디스 공채시업이었다. 유난히 크게 눈에 띄었고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간호로 구태여 고민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원서를 접수하고 어머니께도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KAL 입사시험을 보기로 했다. 

문제는 시험 기간이 1차 시험에서 5차 시험까지 무려 한 달이나 걸리는 대단한 시험이었다. 나는 다음날 수술실로 가서 간호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밤번을 몽땅 맡아 한 달간 자유롭게 낮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했다.

1차 시험은 서류전형
2차 시험은 면접시험+신장검사
3차 시험은 영어, 논문, 상식 등 필답시험
4차 시험은 조중훈 조중건 사장단 면접시험
5차 시험은 chamber  test를 포함한 신체검사

30명 설발하는데 1000명 정도가 지원한 시험은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고 나는 먼저 1차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그 당시는 합격 여부는 명동 미도파백화점 옆 KAL 빌딩 외부 게시판에 붙여놓은 방을 보고 확인해야 했다. 2차 시험은 5명의 대한항공 이사들이 앉아서 수험생 5명씩을 면접하는 것이었다. 면접이 끝난 후엔 장소를 옮겨 벽면에 160cm 되는 검정라인을 길게 표시해 놓고 서게 한 후 한 명씩 사진 촬영을 했다. 키가 160 이하면 무조건 일단 탈락이었다. 1971년 그 당시에는 키가 너무 크면 승객들이 위압감을 느낀다고 하여 168cm 이상은 뽑지 않았다.

그런데 2차 시험장에서 NMC 친구 2명을 만나서 서로가 놀랐다. 나와 한방 친구이며 언제나 방에서 얼굴 단장과 머리 손질을 잘하는 동양미인 성희와 늘 조용한 성격에 미소만 짓는 훤칠한 서구미인 영옥이었다. 우리는 절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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