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고 싶은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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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리고 싶은 풍경화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1.10.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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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이 둘러쳐진 옛날 집 흙마루에 등받이가 있는 낡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자 두 개는 빈자리를 내어 주었다. 지나가던 사람이든 새들이든 바람이든 누구든지 와 앉으라 했다. 그 집 앞을 지나던 내 시선이 그 의자에 앉곤 했다. 

햇볕 따사로운 이른 봄날에 노부부가 조는 듯 꿈꾸는 듯 앉아 있었다. 그 정경이 잔설이 남아 있는 산촌에 온기를 불러왔다.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온갖 풍상을 겪고 살아온 지난 날의 회한을 풀어내는 것일까, 해바라기가 유일한 낙이었을까.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노부부가 정겨워 보였다. 

두 분 사이는 의자 하나를 더 놓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부부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아야 상대를 바로 볼 수 있다고 일러주는 듯했다. 

나는 고즈넉한 풍경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노부부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를 타고 그냥 지나치곤 했다. 

어느 날부터 그 집 흙마루에 낡은 의자 하나만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가끔 할머니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흙마루에 외로움이 감돌았다. 할아버지가 앉았던 의자가 눈에 선하고 그 빈자리가 그리도 허전했다. 굽은 허리, 마른 체격의 할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렸다. 할아버지가 앉으셨던 의자를 굳이 치워버려야 했던 할머니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할머니 댁 텃밭에는 고추가 빨갛게 익어 가는데 할머니의 마음 밭에는 무서리가 내렸으리라.

할머니가 이 집에서 혼자 살 것인지, 아니면 자녀들이 모셔 갈 것인지 궁금했다. 홀로 살아갈 할머니의 여생이 염려되는 것이다. 이웃에 큰 따님이 살고 있어 할머니를 돌봐드리겠지만 평생 고락을 함께했던 남편의 빈자리를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내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여 꼼짝 못하고 있을 때 가장 편하게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남편 아니었던가. 아무리 효성이 지극한 자식이라도 부모 병시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던 의자에 앉아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향년 80세에 생을 마감하셨다. 59세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으셨으니까 2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힘겨운 삶을 사셨다. 수전증이 심해 할아버지 혼자서는 수저를 들 수 없어 할머니가 음식을 입에 넣어 드려야 했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 턱밑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이웃 사람이 음료수병을 따서 할아버지에게 드리고 갔는데 손이 떨려 음료수병을 입에 댈 수 없었고 음료수만 흘렸다. 할머니는 “에이고, 불쌍해라!”라는 말을 연발하며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자는 자녀들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할머니가 끝까지 모신 게 마땅하다고 했다.

그날은 할아버지가 보신탕 한 그릇 먹으면 병이 다 나아서 벌떡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단다. 할머니는 보신탕 재료를 사다가 뒤꼍에서 끓였다. 그것을 보기 위해 할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마당으로 기어 나오셨더란다. 보신탕 몇 수저 드신 할아버지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한 술이라도 더 드셔야 기운을 차린다며 잠에 빠져들려고 하는 영감님이 더 드시도록 애썼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할머니 무릎을 베신 채 요동도 없이 평안한 얼굴로 영원히 잠드셨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처럼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어르신이 얼마나 될까. 요즘은 노인 요양 입소자격기준에 의하여 요양원에 들어가거나 재가 서비스를 받는다. 

할아버지를 지극 정성 간호하셨던 할머니도 요양원에 계신다는 소식이 들린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느냐?”라고 하셨던, 어쩔 수 없어 요양원에 모셨던 어머니 모습에 가슴이 메어온다. 

이제는 옛날 집 흙마루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던 풍경을 볼 수 없다. 그 의자에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던 정겨운 모습, 그 고즈넉한 산촌의 정취는 사라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 무표정의 노인들로 북적이는 요양원 풍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라진 풍경은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미래에 내가 다시 그리고 싶은 풍경화 한 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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