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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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7)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0.28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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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이 승객이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려 나는 회사로부터도 칭찬을 들었다.

연수받는 동안 강의에서 스튜어디스의 기원에 대해 들었다. 스튜어디스는 처음 비행기가 운항을 시작했을 때, 환자가 발생하면서 탄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녀가 동승하여 비행하게 되었고, 이어서 수녀보다는 인상 좋고 외모가 좋은 여성을 태우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여 스튜어디스를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튜어디스의 기원이 환자 때문이었고 간호사가 가장 적임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코피 사건 이후 문득 들었다.

비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장과 사무장, 스튜어디스는 한 팀이 되어 함께 행동하게 된다. 비행기가 대기하는 동안 기내에서 대화하며 스스럼없이 친근하게 되었고, 기장들은 때때로 스튜어디스들에게 커피 좀 갖다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가끔은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기장에 따라 으레 커피를 갖다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상황이 내키지 않아서 일이 있는 척하고 다른 곳으로 가곤 했다. 바로 누르기만 하면 커피가 쏟아지는데 꼭 스튜어디스를 시켜 먹으려는 태도가 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행 비행이 끝나고 지정 숙소인 극동호텔에서 우리 팀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방으로 갔다. 

그런데 잠시 후 기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식사 후에 디저트로 과일이 먹고 싶은데 사과를 좀 사다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무척 못마땅했지만 차마 기장이 과일을 먹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망설이 다가 알았다고 하고 호텔 앞에 있는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사서 기장 방 테이블에 놓으며 “사과 여기 있어요.” 하고 돌아서서 나오려는 순간 기장이 놀고 가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든 모면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기장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저는 피곤해서 가서 쉴래요.” 하고 뛰쳐나왔다. 물론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 기장은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비슷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해서 함께 비행하는 기장들이나 남자승무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의도적으로 도도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J. Song은 거만하고 도도한 여자라고 소문이 났고 이후 내게 커피를 달라거나 과일을 사달라는 요구 등으로 기분 상하는 일은 없었다.

대한항공에 입사 후 나는 특별히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은 그 당시 희소성 있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을 화려하고 멋진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미지를 상쇄하려면 엄격한 자기관리가 필요하고 보다 절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행동하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기 존중은 자신의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도도한 J. Song이라고 부르는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는 도도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학생부터 의사, 기자, PD, 고위공무원, 사업가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소위 연애감정으로 깊게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만나고 나면 상대로부터 배우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접근하면 나는 그날 이후 그 사람과는 만남을 서서히 줄이다가 헤어지곤 했다. 누구를 만나든 내가 정해놓은 통행 금지 시간 9시를 지켰다. 9시가 되기 얼마 전부터 일부러 자꾸 시계를 보며 상대에게 신호를 보내면 상대방은 눈치를 채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때로는 어머니와의 약속한 시각이라고도 해서 자리를 빠져나오기도 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속으로 언제나 내가 장차 어떤 사람과 결혼하여 누구의 아내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떳떳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내가 남자를 만나고 헤어질 때,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 있었다. 절대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고 있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나는 늘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이 나는 외모로 보기에는 아주 여성스럽고 현모양처로 보인 다고들 해요. 그런데 정반대로 나는 살림도 잘할 스타일도 못 되고 여자로서는 빵점인 사람이라 결혼할 상대로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세상에 나보다 더 훌륭한 아내감을 얻을 자격이 충분한 분이니까 더 좋은 여자와 결혼하는 게 맞다.”고

언제나 나에게 문제가 있어 결혼할 수 없는 것으로 말을 하고 상대방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 피하고자 한 것이다. 상대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소중하고 잘난 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L.A. 첫 운항팀으로 선발되었으나…

KAL에 입사한 후 1년 동안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 새로 만난 동료들과도 친구가 되어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또 문제가 생기면 문제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71년 당시 비행스케줄이 있는 날에는 공항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주었다. 우리는 그 쿠폰으로 그 당시만 해도 귀했던 햄과 소시지와 함께 커피 한 잔으로 우정을 쌓아갔다.

비행 생활 1년이 접어들 무렵, 우리나라 처음으로 첫 태평양노선 즉, LA 편이 취항하게 되면서 대대적인 취항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 행사에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참석했는데, 그날 아침 비가 와서 내가 총리곁에서 우산을 씌워드리기도 했다  그 행사 후 KAL에서는 첫 LA 취항의 영광을 누릴 기장, 사무장, 스튜어디스를 선발, 운항팀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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