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8)
상태바
‘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8)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1.04 11: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튜어디스는 그간의 교가 성적과 영어 필기시험, 회화 테스트 성적을 총합하여 각 기수에서 1등을 선발했다. 나는 우리 기수에서 1등을 하여 LA 첫 취항팀 명단에 들어있었다. 

국내선에서 국제선으로의 전환이라 생전 처음으로 여권을 신청해야 했다. 회사에서 여권을 만들기 위한 서류제출을 요구했고 나는 서류를 갖추어 제출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도 내 여권만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짐작되는 게 있어서 내심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알아본 결과 신원조회에서 걸려 여권 발급이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여권이 나올 수 없었다. 참으로 참담했다. 두 돌 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고 자란 아버지 때문에 여권이 안 나오다니…. 

악법도 법이니 그 시대에는 수용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계속 힘써 보겠다며 기다려달라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내게 용기를 주는 회사가 고마웠다. 일정이 정해진 탓에 LA행 첫 비행에는 다음 순서의 친구가 운항팀에 들어갔다. 

그 무렵 우리 12기 동료들은 전부 국제선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국제선이라야 겨우 한일노선과 홍콩 등 동남아 몇 도시에 첫 LA 취항이었다. 총 스튜어디스 수가 90명이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튜어디스 대부분은 서로 이름과 얼굴은 물론 성격까지도 다 알고 있었고 한 기수라도 높은 선배에게는 깎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기강이 대단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더 기다려보자고 말렸지만 나는 자존심이 상해 무조건 기다리며 국내선만 타고 지낼 수는 없었다. 나는 객실 담당 L 이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는 신원조회를 기다릴 수 만은 없으니 대한항공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L 이사는 ‘결혼하기 때문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표를 절대로 내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윗분들과 내 문제를 상의해 보겠으니 당분간 사표는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이사님의 특별한 호의를 봐서라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미니스커트 단속반에 걸리다
TBC 굿모닝쇼 대담에 출연

나는 대학 시절부터 사실과는 달리 멋쟁이로 소문나 있었다. 1967년 대학 입학 때는 대전에서 올라온 시골뜨기로 서울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었다. 당시 내가 부럽고 신기했던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면 목적지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확인하면서도 혹시 내릴 곳을 놓치지는 않나 불안해서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잠시도 한눈을 팔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서울 친구들은 실컷 떠들고 얘기하다가도 “내리자, 다 왔어.”하며 신경도 안 쓰고 내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무얼 보고 딴짓 하다가도 저렇게 귀신같이 알고 내릴까? 나는 언제 이 공포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한 것이다.

아마 처음 서울 친구들 보기에 나는 완전히 촌스러운 시골뜨기였을 것이다.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입학식에도, 나이팅게일 선서식에도 서울 사는 이모가 엄마 대신 참석해 주셨다. 입학식에 입고 갈 옷도 그 당시 스프링 코트라고 하는 분홍색 코트를 맞춰주시고 구둣방에서 빨간 단화도 한 켤레 맞춰주셔서 내 딴에 멋을 부리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그 후 학교 다니는 동안 나는 주말이면 영등포에 사는 이모 집에 가서 6학년이던 사촌 동생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모로부터 용돈을 받아 썼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편하고 가까운 버스보다는 25원 하는 전철을 이용했다. 동대문에서 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린 다음 20분 이상을 걸어야 했지만 얼마라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모한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이모부께서 68년부터 베트남 월남전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월급을 받아 이모댁은 부유했다.

이모 댁에 가면 저절로 빵이 구워져 위로 톡 튀어나오는 기계(나중에 토스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도 있고 갓 구운 빵에 고소한 버터를 발라 계란후라이까지 얹어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내가 그 맛있는 빵과 계란후라이를 안 먹겠다고 도망 다니는 동생들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모부가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국에 나오실 때는 비행기가 홍콩을 거쳤기 때문에 홍콩백화점에서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좋은 물건을 엄청나게 사 오셨다.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이모부는 이모에게 줄 선물로 옷을 많이 사 오셨다. 그런데 문제는 눈썰미 없는 이모부가 산 옷은 멋지고 예쁜 고가의 사철 옷들로 전부 모델 수준의 날씬한 몸매에 맞는 옷들이었다. 몸이 비교적 퉁퉁한 이모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모 역시 옷에는 큰 관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그 많은 고가의 멋진 브랜드 옷은 전부 내 차지가 되었다. 원피스도 투피스도 니트도 모두 내 몸에 맞춘 듯했다. 색깔도 홍콩 백화점 아가씨들이 추천해 준 옷들이라 세련되 었다. 이모 덕분에 나는 60년대에 세계 최고의 브랜드를 입는 행운을 잡았으니 어찌 멋쟁이로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내가 3학년 겨울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3,000원짜리 반코트 하나를 골라 사서 입고 나갔더니 모두 멋지다면서 당연히 외제라고 생각해서 홍콩제인지 프랑스제인지를 물어 묻는 사람이 무안할까봐 차마 사실대로 밝히지 못하고 어물어물 넘어간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본의 아니게 이모부 덕에 최고 브랜드만 입는 멋쟁이가 되어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이모로부터 옷 조달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친구 소개로 명동의 유명 의상실도 소개받았다. 그 의상실은 한국일보 주최 미스코리아대회 참가자들의 옷을 전용으로 맞춤하는 유명 디자이너 ‘윤성준 의상실’이었다. 사실 내 형편으로 명동 최고의 의상실은 언감생심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