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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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29)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1.11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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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를 만난 윤성준 디자이너는 내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무조건 반값 이하로 저렴하게 옷을 주었다. 패션쇼 에서 모델들이 입고 쇼잉한 의상들은 맞는 사람이 없어 팔리지를 않는데 그 옷들이 내게는 맞춤처럼 잘 맞았다. 내가 옷 복을 타고났는지 패션쇼에서 입었던 원피스, 투피스 등 멋진 옷들을 내게는 무조건 한 벌에 만 원도 안되는 가격에 주는 바람에 최고의 패션을 입었던 덕분에 대한항공에서도 멋쟁이로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윤성준 디자이너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 실을 한국 여성의 수영복 스타일 사진 모델로 나를 세우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물론 우리 집에서 알면 양반집에서 무슨 해괴한 짓이냐고 당장 쫓겨날 일이었다. 나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패션모델이 입던 옷을 사서 입다 보니 60년대 유행하던 미니 스커트를 많이 입게 되었다. 무릎 위에 올라가는 스커트가 마음에 걸려 한마디 하면 디자이너는 나 같은 사람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으면 누가 입느냐며 권했다. 

그 당시에는 무릎에서 17cm 이상 즉 한 뼘 이상인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남자들이 머리를 기준 이 상으로 길러 장발을 하면 길거리에서 경찰이 자로 스커트 길이를 재며 단속했고 장발 역시 단속에 걸리면 머리 일부를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인권 침해라고 난리가 날 일들이 당시에 는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었다. 

나도 어느 날 큰 길을 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다가오더니 스커트 길이를 재 보자고 했다. 나는 놀란 가슴에 감색 튜닉의 스커트 길이를 재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는 한 뼘 정도 무릎 위의 스커트를 재 보니 딱 17cm라며 경고를 받았다. 지금의 미니와 비교하면 당시의 미니스커트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점잖았는데도 규제 대상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에 TBC(동양방송)에서 연락이 왔다. ‘TBC 굿모닝 쇼’ 대담프로에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단속이 과 연 적절한가를 주제로 한 토크쇼였다. 나는 마침 며칠 전에 미니스커트 건으로 단속당한 경험이 있어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을 피력했고 여성들의 개성과 의상 스타일을 경찰이 단속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무릎 위 17cm라는 기준부터 황당하다고 지적했다.

언제부터인지 미니스커트 17cm 이상 단속은 폐지되었고 더는 규제 때문에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고민하는 여성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조중훈 사장님 비서라면 KAL에 남을게요

사직 의사를 표하고 난 며칠 후 L 이사가 나를 불렀다. 윗분 들과 내 문제를 놓고 상의한 결과 조 사장님께서 먼저 내 의사부터 확인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었다. L 이사는 대한항공에서는 일단 내 사표 제출 건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대한항공 회사 내에서 내가 가고 싶은 부서가 있으면 어디든지 발령을 내기로 윗분들과 결정했으니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대한항공을 그만두려던 계획을 일단 접기로 했다. L 이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조중훈 사장님 비서로 보내주세요. 그럼 대한항공에 남아 계속 일해보겠습니다.”

예상치 않은 내 대답에 L 이사는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내게 말했다.

“마침 비서가 그만두니 가능할 것 같군요. 사장님께는 바로 보고 드릴게요. 인수인계 등을 하는데 한 달 정도 견습이 필요할 거예요. 내일 비서실에 전화해 놓을 테니 내일 비서실로 가 봐요.”

L 이사가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나도 사장 비서가 결혼하게 되어 사표를 낸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던 터였기에 사장실 근무를 제안 했었다. 다음날 사장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비서실에 들렀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11기 선배 스튜어디스 Y. Lee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 선배 역시 사장 비서가 그만둔다는 소문을 듣고 모 임원을 통해 제안하여 사장실에 들렀다고 했다. 참으로 고약한 우연이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 선배는 11기에서 성깔 있는 군기반장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만일 내가 자기를 제치고 이 비서직에 근무하게 되면 선배를 쫓아낸 후배로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할지 눈에 선했다. 나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L 이사에게 사장실 근무는 포기하겠다고 했다. L 이사가 놀라며 내가 원하면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나를 발령내겠다고 했지만 나는 선배를 몰아내면서까지 꼭 그 자리에 갈 이유는 없다는 생각으로 비서실 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랬더니 L 이사는 천천히 생각하면서 다시 대한항공 내에서 원하는 곳을 생각해 보라고 재차 권했다.

대한항공 TV 광고에 출연하다

비서실 근무를 포기하고 며칠 후 다시 L 이사를 만났다. 조선호텔에 대한항공 국제선 사무소(CIO, Chosun International Office)가 곧 오픈된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L 이사는 흔쾌히 수락하고 사장님께 보고한 후 발령내겠다고 했다.

새로 여는 CIO는 대한항공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여행스케줄을 짜 주고 여정에 따라 마일리지를 계산하여 항공료를 산출하고 티켓팅까지 해주는 전문성이 필요한 자리라서 사실은 그 직무를 하던 사람이거나 일정 기간 업무연수가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런 업무적 성격을 감안하면 나는 사실상 연수도 받지 않은 무자격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인사발령을 허락한 셈이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외국인들이 내미는 크레딧카드를 구경했다. 돈 대신 내미는 조그만 카드 한 장으로 모든 비용이 계산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신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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