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어진 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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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어진 궁합
  • 동탄 이흥주 수필가
  • 승인 2021.11.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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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면 빼놓지 않고 산책을 나간다. 바쁠 때야 물론 못 나가지만 시간만 나면 걷는게 일과다. 내가 누누이 말한 바 있지만 산책이야말로 삶의 활력소다. 산책은 준비물이 없다. 그냥 맨손으로 나서면 된다. 휴대폰은 상비물인지라 당연히 따라붙지만 요즘은 또 하나 마스크가 상비물이 됐다.

올해는 때아니게 일찍 온 한파로 이틀간 서리가 하얬었다. 서리가 없는 날도 꽤 추운 날씨에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왔다. 요 김이 바로 입 앞에서 공중으로 날아야 하는데 마스크란 녀석이 이걸 모아 심술궂게도 안경의 유리알에다 배달한다. 대책없이 안경알은 뿌연 김으로 덧 씌워진다.

안경 없이는 생활이 안 되는 내 사정이야 알 바도 아니다. 갑자기 앞이 오리무중이 되어 걷기가 힘들다. 산책에 안경이야 안 써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수시로 오는 카톡 문자를 볼 수가 없다. 또 아는 얼굴을 만나도 그냥 지나치는 실례를 범할 수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못 보게 되니 비 오는 날 장화 없이는 살아도 안경없이는 안된다.

한데 이처럼 중요한 안경은 벗을 수가 있어도 몇 겹 얇은 천으로 된 마스크는 못 벗는다. 산책길은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아무도 없어 벗었다가도 앞에서 사람이 오면 얼른 다시 쓰든가 무안당한 사람처럼 외면하고 얼른 옆으로 멀찍이 비켜 걸어야 한다. 

요즘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피하려고 하는 몹쓸 풍습이 생기고 있다. 이런 때 마스크의 세도가 대단하다. 제 녀석은 얼굴에 철석같이 붙어있으면서 일회용 삶인 저보단 엄청나게 비싼 안경을 이긴다.

날이 추워지니 만나면 티격태격 싸우는 이 녀석들도 따뜻한 봄부터 가을 초입까진 사이가 좋았다. 한데 날만 추워지면 마스크가 심술을 부린다. 철마다 성격이 변하니 궁합이 맞을리 없다. 내가 볼 땐 마스크 잘못이 많다. 마스크가 제 운명을 모른다. 코로나란 성가신 불청객이 잦아들면 제가 개밥 신세가 될 거란 걸 전혀 모른다. 그때야 누가 저를 그리 대우할 사람이 있을까. 

코로나가 없을 땐 마스크야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물건이었다. 겨울에 보온용으로나 사용하고 봄철 황사나 미세먼지가 많은 날 일부 사람들이나 쓰는 물건이던 것이 이거 한 장 구하려고 약국 앞에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했던 귀하신 몸이 되었다. 지금이야 흔한 물건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영광을 못 잊나 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성스런 면이 많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외국 사람들이 이걸 한사코 안 쓰려고 하는 걸 보고 알았다. 우리들은 거리에 나가보면 아이, 노인네 할 것 없이 다 얼굴을 덮고 다닌다. 백신도 별 저항없이 팔뚝을 들이댄다. 서로 맞으려고 잔여 백신에 달려든다. 우리보다 일찍 백신접종을 시작해서 부러움을 샀던 여러 나라들이 우리보다 접종률이 떨어진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2년 여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공포 속에서 모든 것이 비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이 잃어버린 세월을, 상처받은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 옛날에도 염병이라는 것이 동네를 휩쓸어 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앓아 누웠다는 얘기를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간 완전히 정복해서 사라진 질병도 있고 지금은 별로 두렵지 않은 질병으로 돼 있는 게 많다.

코로나도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독감처럼 예방접종을 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어떤 질병이 예고없이 찾아온다고 해도 잘 헤쳐나가고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얻은 게 값진 보상일 것이다.

그간 우리를 코로나로부터 잘 방어해 준 마스크가 조금의 불편을 준다 해도 타박하지 말아야겠다. 추운 아침에 안경에 하얗게 김이 서리면 기꺼이 마스크 대신 안경을 벗어야겠다. 나를 보호해 준 마스크에게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춰야겠다. 이렇게 해서 둘의 틀어진 궁합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주고 싶다. 

마스크는 여러 면에서 고마운 점이 많다. 우선 내 감정을 마스크 속에 숨기고 표정관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온 나라를 들썩이는 대선 얘기가 그렇지 않은가. 무슨 얘기, 어떤 얘기를 해도 마스크 뒤에서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오늘 산책길에서도 난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 명상에 젖어 걷는다. 여기서 건져온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마스크야 그간 고마웠다. 이제 코로나가 가더라도 너를 가까이 두려한다. 미세먼지나 황사를 막는데 나를 계속 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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