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5)
상태바
‘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5)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2.23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워낙 강하게 원했고 또 평소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편도 더는 반대를 계속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고집을 꺾지 않고 이루어낸 일이었다. 

곧바로 나는 교수채용 지원서를 넣게 되었고 이어서 면접날이 왔다.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원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막 면접실을 들어가자 원장님이 면접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말씀하셨다.

“이 송지호가 그 송지호 맞아?”

그러면서 동명이인은 아닌가 하고 나를 쳐다보셨다. 

“응, 그 송지호가 맞군.”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바로 교무과장에게 말했다.

“다른 지원자들은 더 면접할 필요가 없으니 송 선생을 발령내도록 하세요.”

그러자 교무과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논문 두 편을 제출해야 하는데 집에서 놀다가 갑자기 지원하게 된 송 선생은 제출한 논문이 한 편도 없어서 그게 좀….”

“그 논문이야 들어와서 1년 안에 2편 쓰라고 하면 될 거 아닙니까? 1년 안에 논문 2편 제출하는 조건의 각서를 받고 송 선생을 발령하도록 하세요.”

그야말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그것으로 내 임용이 결정되었다. 나는 1년 안에 논문 2편을 틀림없이 제출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발령은 받았지만 아마도 이런 경우는 국내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원장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에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박찬무 원장님이 학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박 원장님은 NMC 간호사 파업 당시 수술실에서 내게 간호과 수퍼바이저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의 말씀을 하셨고 나는 자의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던 바로 그분이었다. 

81년 4월, 전임강사 발령을 받으며 각서로 대체한 논문 두 편 쓰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출산 때 산후출혈로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9개월이 된 때라 건강도 완전하지 못했고 수술 후 42kg이던 체중도 겨우 47kg 정도여서 체력도 달렸다. 

종일 구두 신고 근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연구논문을 두 편이나 써야 했다. 당장 연구논문들을 수집하여 읽으면서 논문의 형식과 방법, 내용을 독학했다. 실험논문은 통계 방법 및 통계 결과 해석을 혼자 익혀가면서 연구 논문 2편을 약속한 기일 안에 제출했다. 그 발령 첫 해의 어려움을 잊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퇴근하면 돌도 안 된 둘째가 있어 휴식도 취할 수도 없었다. 몸은 천근만근 힘들어도 나는 힘들다고 생각지 않았다. 남이 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남보다 배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야 함은 당연히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강한 인내심은 어머니를 보며 스스로 익힌 내공이었다.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5년 넘게 놀고 있던 나를 교수 채용심사에 지원해보라고 전화를 주신 박춘자 교무과장님. 그리고 그 많고 훌륭한 지원자들을 제쳐두고 학사학위도, 논문 한 편도 없는 나를 임용하기로 결정 해주신 박찬무 학장님. 일어날 수 없는 이 일들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말 그대로 운명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지금부터 40년 전 일이지만 사표를 내고 퇴직한 사람을 같은 직장에서 세 번째 다시 받아주기도 쉽지 않거니와 NMC가 사립기관이 아닌 국립대학의 교육 공무원 임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먼 훗날 35년간의 교수 생활을 통해 네 번이나 NMC 간호 대학의 폐교를 막아 학교를 위기에서 구하고 또 내 손으로 NMC를 폐교하고 성신여대 간호대학으로 거듭나는 운명적인 일들을 해내라고 그 분들이 다시 나를 불러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하나, 대학원을 해야 하는데…

81년 당시 교육법전 상으로는 일반대학은 학사학위, 전문대학은 전문학사 소지자는 전임강사 발령이 가능했다. 그러나 어차피 대학에서 교수로 남으려면 석·박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도 그 당시 학제하에서는 편입학할 길이 없었다. 4년제 간호학과는 서울대, 연대, 이대 뿐이었는데 간호학과는 편입학제도 자체가 없었고 성균관대학교에서처럼 일반학과는 간호학이라는 특수 교과목으로는 상호학점 인정이 될 수 없어 불가능했다. 남들은 공부를 더 하고자 해도 공부할 길이 없는 시대도 있었음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당시 간호학과는 대부분이 3년제였기 때문에 간호학과 졸업생들은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는 희한한 풍경이 벌어졌다. 아니면 불법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여 가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면 지금 어느 누가 믿겠는가? 샘물을 파보지 않은 사람은 샘만 파면 물은 나오는 법인데 샘을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방송통신대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방송대학교는 초창기에 5년제로 개설되었고 방송대학교에서는 별도로 교수를 채용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모든 강의를 진행했고 방송강의 외 교실 강의는 모두 서울대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그나마 가능한 방법은 방송대학교에 편입학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가정학과 3학년에 편입학을 했다. 5년제이니 3년을 더 다녀야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방송대학에 다니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국내 최고의 NMC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교수로 나가고 있는 내가 다시 방송대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둘째 시누이 남편이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