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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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37)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1.06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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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교수가 아니고 그냥 자연인으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암적 존재라는 제게 상상하기조차 힘든 말은 듣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곱씹어 생각해보아도 제 논문이 그런 엄청난 문제의 연구물이라는 생각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떳떳한 논문이 어떻게 한국에서는 암적 존재라는 것인지 참으로 제 좁은 식견으로는 알 수가 없어 그저 제가 부끄럽고 참담할 따름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심사숙고 끝에 그래도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기에 이 글을 드립니다. 

만일 선생님이 제가 존경하지 않는 분이었다면 저는 제 가슴앓이로 평생을 선생님을 원망하며 말 못하고 지내더라도 그 길을 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평소 누구보다 제게 소중하신 선배 교수님으로 각인된 분이시기에 또 다른 어느 강연에서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 불특정인으로부터 원망을 듣거나 섭섭함을 느끼게 하셔서는 안 되는 저만이 아닌 우리의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 글이 선생님을 불편하게 한 점이 있더라도 그런 제 마음으 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쓰고 나니 내 마음이 훨씬 떳떳하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꼬마둥이 신임교수인 내가 감히 간호계 최고 원로교수이자 국회의원인 분께 이런 편지를 보내다니 한편으로는 교무과장님 말씀이 또 귓전을 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말하고는 못사는 성격인지라 그 편지를 부친 후에 교무과장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당연히 펄쩍 뛰며 감히 그런 분한테 기어이 편지를 보냈느냐고 한마디 하셨지만 나는 NMC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냥 말 수는 없었다며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마시라고 오히려 위로해 드리고 나왔다.

편지를 보내고 사흘 후에 A의원실 비서가 전화하여 A의원을 연결 해주겠다고 했다. 가슴은 쿵쾅거렸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

“송 선생이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아보았어요. 내가 송 선생 편지를 세 번 네 번 아니 그 이상 외울 정도로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읽었어요. 편지를 본 후 지금까지 사흘간은 두문불출하고 많은 생각을 했지요. 송 선생 편지는 나를 한 번 다시 되돌아보고 생각할 기회를 주었어요. 송 선생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내가 어떻게 치유할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송 선생한테 꼭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다음날 여의도로 와서 함께 식사하자고 하셨다. 나는 전화를 받고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 역시 선생님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30대 초반의 교수 초년생이 감히 보낸 편지를 보시고 그렇게 솔직하고 진솔하게 낮은 자세로 제자뻘인 나에게 사과를 하실 수 있는 큰 가슴을 가신 선생님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곧장 교무과장실로 가서 전화 받은 이야기를 전했고 교무과장님도 “역시 송 선생은 대단해.” 하며 좋아하셨다. 다음날 여의도 중국집에서 A 의원은 맛있는 점심을 사주셨다. 내가 먹어본 중에 가장 맛있는 점심을 가장 멋진 선생님과 함께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럴 거면 박사보다 자연인으로 살겠습니다

82년 3월, 나는 이대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내 나이 34세였다. 석사생 중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학생도 있었고 나처럼 대한민국 팔도를 유람하고 전업주부로 5년 이상 지내다 다시 교수 신분 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교수 신분으로 다시 학생이 되어 공부한다는 것은 내 성격으로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학생이지만 교수였기에 늘 모범이 되어야 했고 또 앞서가야 했다. 강의시간에는 교수와 학생으로 만나지만 대외 교수 활동에서는 같은 교수로 만나는 처지의 교수를 대하는 일 역시 서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나를 제외한 학생들 대부분은 대학 졸업 후 나처럼 또 하나의 힘든 단계를 거치지 않고 쉽게 대학원에 진학한 4년제 출신 학생들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무엇 하나 어린 학생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하나라도 더 도움을 주어야 한다. 프리젠테이션도 내가 하나 더 맡고 번역물이 있어도 그들보다는 내가 교수니까 더 많이 맡겠다고 작정했다. 내가 다른 학생과 똑같은 실력을 보이면 당연히 그들이 우수하다고 볼 것이니 내가 3년제 대학 출신인 점과 현직이 교수인 점을 고려해서 그들보다는 두 배, 아니 세 배쯤은 잘해야 겨우 똑같아 보이거나 조금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공부에 임하기로 했다. 그런 덕분에 동료 학생들은 내게 “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달리 저희보다도 더 빠르게 모든 일을 앞서 하시니까 저희가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되는 것 같아 저희끼리 놀라요. 다른 나이 드신 분들은 저희가 과제도 대부분 더 많이 맡아 하고 발표도 저희가 많이 하거든요.” 나는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4학기가 끝나고 석사학위 논문심사가 다가왔다. 나는 아동간호학 전공이었기에 「주사 시 아동의 불안감소를 위한 심리적 간호」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사위원장실에서 논문심사가 진행되었고 첫 순서로 논문심사장에 들어갔다. 심사위원들이라지만 평소에 잘 아는 교수들이었기에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 심사위원이 나에게 옆에 있는 스툴(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를 가리키며 그 의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스툴을 가져오라는 이유도 모른 채 들고 왔다. 

스툴을 가져오니 나에게 앉으라는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모두 소파에 앉아 있고 나는 가져온 스툴에 앉기는 했지만 순간 정신이 핑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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