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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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40)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1.27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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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강당에 가득 찬 수험생들이 사전까지 놓고 영어책을 뒤적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나온 강당 밖 복도는 마치 냉동실처럼 느껴졌다. 얼어붙은 것은 복도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위를 덜고자 평소에 입에 대지도 않던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 벤딩머신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받아 홀짝거리며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10시가 되어 내 자리로 가서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한 문제가 종이 반장은 차지하는 엄청나게 긴 지문 4문제가 있는 시험지와 백지 2장을 나누어 주었다. 시험문제는 4문제를 번역하는 것으로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었다.

문제를 읽어보니 콤마로만 끝없이 연결되는 문장으로 주부와 술부를 찾기도 힘들 정도의 긴 지문이었다. 4문제가 2시간이니 한 문제당 30분씩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앞에 놓고 정신없이 번역을 시작했다. 겨우 한 문제 번역이 끝날 무렵, 갑자기 뇨의가 느껴졌다. 이제 겨우 한 문제 풀었는데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앞으로 1시간 반 동안 소변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 중요한 박사시험에서 이런 황당한 일이 내게 생길까 생각하니 순간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던 커피를 한 잔 마신 것이 내 일생일대의 실수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오래 할 수 없는 절박한 시험시간이었다. 그 순간 내가 이 시험을 아예 포기하고 화장실을 가느냐 아니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고 시험을 볼 것이냐를 빨리 결정해야 했다. 

결국, 후자를 택했다. 이런 황당한 일로 박사시험을 포기해서 낙방한다는 것은 정말 허무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2번 문제 번역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리를 있는 힘을 다해 꼬고 앉아서 최대한 빨리 문제를 읽고 써나갔다. 그렇게 4문제를 정신없이 풀고 나니 12시 5분 전이었다. 모두 정신없이 시험을 보고 있는 시간에 나는 말 그대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어찌나 다리에 힘을 주고 장시간 앉아있었던지 허리와 다리 가 뻣뻣해져 잘 뛸 수도 없었다. 그래도 별일 없이 시험을 마칠 수 있었 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보기를 너무나 잘했구나 싶었다. 시험이 끝나자 점심시간이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식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우리 NMC 내과, 마취과 의사 2명을 만났다. 서로가 혹시 떨어질까봐 비밀리에 본 시험이었는데 시험장에서 딱 맞부닥뜨렸으니 어쩔 수 없이 서로 웬일이냐며 인사했다. 마취과 의사 이 선생은 내게 “아니, 내가 의사하면서 지금까지 원서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렵고 긴 문장만 찾아서 영어시험에 내는 거냐? 문제를 받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며 불평했다. 그러면서 시험문제가 뭐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내게 문 제를 물었다.

나는 1번 문제는 1969년 암스트롱이 달에 첫 인공위성 착륙한 사건, 2번 문제는 열역학 엔트로피(entropy), 네겐트로피(negentropy), 3번 문제는 실존주의, 4번 문제는 연구방법론에 관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마취과 의사는 깜짝 놀라며 그것을 어떻게 다 기억을 하느냐며 나는 합격하고 자기는 떨어질 것 같다며 걱정했다. 오후에는 전공시험이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일, 나는 합격이었다. 마시지 않던 커피 한잔으로 인해 예상치 않은 위기는 있었지만 합격으로 끝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합격 발표가 나자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왔다. 1985년 당시 국내에서 간호학 박사과정이 개설된 곳은 서울대, 이대, 연대 등 3개 대학뿐이었기 때문에 간호학 교수가 박사과정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뉴스가 될 정도였다. 내가 합격할 때도 20:1의 경쟁률이었으니 전국 모든 대학에 석박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일이다.

박사과정 합격증은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내가 아이 둘을 놓고 직장에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여 가끔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던 남편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박사과정에 합격 한 후 남편이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다.” 그 후로는 한 번도 학교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사과정 2학기, ‘Spiritual nursing care.’라는 강의시간이었다. 원서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에 어느 교수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외국에서 석사 하셨다지요?”

깜짝 놀라 나는 이대 석사라고 하자 내가 외국에서 석사를 하여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처럼 영어는 참으로 나에게 여러가지 사연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그날 강의시간에 원서강독 중 글씨가 유난히 크게 내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었다.

‘God has a plan for me.’
그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그 문장에서 멈추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지금까지 많은 의문과 후회와 그로 인한 외도 등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세 번 째나 나를 NMC에 기어이 돌아오게 하여 간호학으로 결국 박사를 하게 한 모든 물음표에 대한 답이 그 글귀 하나에 녹아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아니라고 도망 다녔지만, 하나님은 나를 낳을 때 이미 나를 위한 계획을 만들어서 나를 간호 세상에 내보내신 것임을 그 날 그 시간 그 책 그 글귀에서 뒤늦게 발견했다.

송 교수가 어떻게 ICN 한국 대표가 된 거요?

2002년 나는 대한간호협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사는 대의원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10명이 선출된다. 내 의지보다는 최영희 교수님(이대 간호대학장, 대한간호협회장)의 적극적인 선거운동 덕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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