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신기리 출신 정기성은 라디오콩쿠르 수상자였다”④
상태바
“옥천 신기리 출신 정기성은 라디오콩쿠르 수상자였다”④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8.04 1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달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집자주>

 

오재헌 이발사가 증언하고 있는 모습

옥천읍 오재헌 이발사 생생 증언

옥천읍에서 60여 년 동안 이발소를 운영해온 오재헌(71·현 대도이발소·사진)씨는 그날의 아픔을 이렇게 상세히 증언했다. 오씨는 “당시 옥천읍 신기리, 금구리, 가화리에 살고 있던 7명의 친구들은 거의 20~21세 나이였어요. 특히 신기리의 정기성은 나와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지요. 운동(유도)도 잘하고 마침 군대갈 나이가 되어 어차피 갈 거면 특별대우에 여건이 좋은 당시 ‘켈로 부대’로 명명됐던 그 부대로 간다고 하더군요. 들은 바로는 6개월간 교육받고 외국에 나가 생활하는데 그게 되겠느냐고 의심을한 적도 있어요. 당시 1968~1969년에는 순수한 청년시절을 보냈지요. 대부분 가난했던 그들은 동네마실 다니고 당구치고 그렇다고 농사도 못 짓고 기술도 없고 교육도 초등학교만 나온 상황이어서 살기가 어려웠다”라며 “5남1녀 중 다섯째였던 정기성은 노래를 잘해 라디오 콩쿠르에 나가 여러 번 상을 받을 정도였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이발소에서 나와 함께 숙식하며나는 이발 기술을 배우고 그 친구는 ‘연흥회관’이란 노래학원에 다니다 내가 먼저 고향으로 내려오자 뒤따라 내려왔는데 고향에 있던 K씨를 통해 포섭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내가 군대를 마치고 제대할 무렵이니까 1972년 5월 초쯤 되었을까요. 서울 유한양행 앞 도로에서 실미도를 탈출한 그 친구들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게 그 친구들과의 마지막 사건이다”라며 “하긴 나도 갈 뻔 했지요. 이발소를 하던 중이라 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친구들과 당시 ‘럭키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었는데 까만 세단차가 와서는 그 친구들을 모두 태우고 있었어요. 뒤늦게 나가보니 탈 곳이 없어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교육대장·소대장·기간병은 쌀밥, 공작원들은 보리밥 ‘격차’

기간병 한○○(재판기록1권)는 재판기록에서 기간사병들은 일정한 양이 없어 식사가 적으면 더 먹을 수가 있지만 공작원들은 일정한 양 이외에는 식사가 적어도 더 먹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한 솥에 밥을 하면 교육대장, 소대장급들에게는 쌀밥을 퍼서 주고, 기간사병들도 공작원 식사보다는 보리가 덜 섞이기 때문에 공작원들은 자동적으로 보리가 많이 섞이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급식관계로 조장을 통해 배가 고프다는 것을 건의한 일이 있으나 교육대장은 ‘우리나라는 풍부한 나라가 못되기 때문에 잘 먹을 수 없다.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고 훈시를 하면서 일체의 건의를 묵살하였다.(국방부군특병검열단,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1971.8.30.)

부대관리 실태(실미도사건조사보고서,2005.8.9.)

초기에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부대 창설 관계자들의 엄격한 교육훈련 통제로 6개월 이후 공작요원의 기량이 숙달 단계에 도달하였으나, 임무 투입 시기가 계속 지체되면서 군기사고가 발생하는 등 부대 관리가 어려워지고, 창설시 관계자들이 지휘 라인에서 교체되면서 부대관리는 부실해졌다. 창 설 시 보 직 자 ( 6 8 . 4 ) 는 김 형 욱(63.7.12~69.10.20) 중앙정보부장에 서 보 직 변 경 자 ( 6 8 ~ 7 0 ) 김계원(69.10.21~70.12.20)에서 사건시 보직자(71.8) 이후락(70.12.21~73.12.3) 중앙정보부장으로 변경됐다.

국방부장관은 최영희(68.2.28~68.8.25)에서 보직변경자 임충식(68.8.25~70.3.10)으로 사건시 정래혁(70.3.10~71.8.25)으로 변경됐다. 209대 파견대장 김응수는 실미도에 연속으로 머문 날이 많지 않았고 한총은 다른 부대와 겸직한 상태로 월간 2,3회 방문에 그치는 등 실제로 부대를 지휘 관리하지 못했고 교육대장이 사실상 부대를 지휘했으나 수시로 육지에 나가 3일 내지 15일간씩 있다 들어오고 교육기간 중 수개월 간 부재하는 등 장기적으로 자리를 비울 때가 잦았으며 장교가 상주하지 않은 채 사실 상 부사관이 임의로 부대를 지휘하면서 책임소재가 애매해지고, 교육대장과 나이차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어리면서도 함부로 대하는 기간병들에 대해 공작원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공작원들에게 ‘가군번’을 부여하여 공작원들이 스스로 ‘중앙유격사령부 소속의 현역 군인’으로 인식하도록 하였다(공작원들은 자신의 소속으로 중앙유격사령부 684특공교육대를, 군번으로 7319455(임성빈·충남), 7310454(이서천·대전), 7319458(김창구·청주), 7319470(김병염·옥천〉을 진술하였다. 임성빈은 정식 군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군 인사기록카드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였다)(재판기록3권)

중앙정보부의 훈련 상태 점검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실미도를 연2회 이상 방문하여 훈련정도의 파악 등 부대감독을 하였다. 중정의 공작단장 윤○○은 실미도 훈련 초·중기쯤 헬기를 타고 실미도 부대를 2회 방문하였으며, 공군담당 중정요원 이○○은 1968.5.10. 부대 창설식에 참여하여 훈련정도를 직접 점검하였다. 공군2325부대는 1968~1971 ‘연간 사업계획서’ 및 ‘연간 공작현황 보고서’를 중앙정보부에 제출하여 조정과 승인을 받았으며 매월 공작현황(훈련 상황 및 계획, 예산)을 중앙정보부에 문서로 보고 하였다(윤○○은 위원회 면담조사에서(2006.3.14.) 공군2325부대 부대장이나 공작과장(정봉선)이 자신에게 보고한 것은 매월 25일 각 군 정보 담당자들이 모여 브리핑할 때 나온 것으로, 따라서 자신은 실미도 부대의 전반적인 현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정기적 감사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상부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부대를 방치하였고, ‘목적이 상실된 부대는 해체’되어야 하나 중정부장이 김형욱에서 김계원으로 교체되면서 사실상 방치되기 시작하였다.(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서전‘혁명과 우상’에서 “1969년 5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들어서자 나는 날씨가 이만하면 결사대가 야영을 하는 경우에도 얼어 죽지는 않겠다고 판단하고 만반의 준비 후에 박정희를 방문하여 평양에 결사대 투입 준비 완료를 보고하였다. 처음에는 그다지도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가 웬일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박정희는 그때 이미 평양당국과 비밀 교섭을 하고 있었다.” ‘별명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고 계획을 연기하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노골적인 반발을 한 후 몇 달 후에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에서 전격 해임되었고, 후임자인 김계원, 이후락은 이들을 해체시키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서 죄인 취급을 하고 특수부식비 마저 중간에서 떼어먹어(공작원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