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 꽃이 필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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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시 꽃이 필 때면
  • 김기순 수필가
  • 승인 2022.05.1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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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자 방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향기. ‘아! 이 향기’ 가슴 한편에 묻어 두었던 아득한 그리움이 살포시 깨어난다.  

깜빡 스쳐 지나칠 뻔했던 5월 초하의 아까시 향기가 천지를 물들이고 있다. 지근거리라지만 내 방에까지 날아와 주다니.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이 온통 하얀 꽃동산이다. 혹여 잊혀 질까봐 아니, 잊혀 졌을까 보아 이리 진한 향기로 녹아 나를 찾아온 것인가. 

아까시 꽃이 필 때면 보고 싶은 동무가 있다. 나의 단짝 난이다. 

난이와 나는 한동네에 살았지만 석 달 전에 우리 동네로 이사 온 난이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동그란 얼굴에 웃을 때는 보조개가 예쁜 아이였다. 우리는 같은 반이 되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짝이 되었다. 

농사짓는 우리 집과 다르게 난이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다니는 신사였고 서울에서 사업을 한다고 했다. 난이 아버지는 가끔 집에 왔는데 그럴 때면 학교에도 찾아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갔다. 

난이는 도시아이들처럼 운동화에 빨간색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녔다. 검정 고무신에 보자기로 책을 싸서 허리춤에 동여매고 다니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멋쟁이였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서 누워있는 날이 많았고 집안 살림은 할머니가 도맡아 했다. 4남매의 맏이인 난은 할머니를 도와 동생을 업어주고 아픈 어머니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아까시 나무가 많았다. 최 부자 집 울타리는 아까시 나무로 길게 둘러쳐져 있었는데 예배당 담장 너머로 덩굴장미가 빨갛게 농익을 때쯤이면 최 부자 집 울타리에도 아까시 꽃이 하얗게 꽃그늘을 드리웠다. 

우리는 최 부자 집 아까시 나무 아래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꽃잎을 모아 꽃길도 만들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깔깔대며 뛰어다녔다. 난은 아까시 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땐 어머니에게 줄 거라며 아까시 꽃을 한 아름 따서 집으로 가져갔다.
3학년 가을 차가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난이가 결석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퉁퉁 부어서 시난고난 누워있던 어머니는 결국 오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신 것이다. 
얼마 후 난이 네에 새어머니가 들어 왔다.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새어머니라는 젊은 여자는 난이 아버지 첩이고 어머니가 죽기 전부터 딴 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었다고 했다. 첩 때문에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죽은 것이라 했다. 

어머니가 죽고 채 이태도 되지 않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다시 동네에는 듣기에도 면구스런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새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을 구박한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난이의 옷이며 차림새가 전 같지 않게 누추해 보였다. 놀자고 찾아가면 새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5학년 1학기 초여름 어느 날 난이가 나를 찾아왔다. 최 부자 집 울타리에서는 연두 빛 잎새 사이로 마지막 남은 아까시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 날고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이도 그런 것 같았다. 둘은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헤어질 때 난은 연필 하나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연필을 쥐어주는 난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며칠 후 난이 네가 이사를 갔다. 2년 전에 사랑하는 언니가 죽고 아직 이별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맞이한 이별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슬픔이었다. 

가슴이 미어질듯이 아프고 눈물이 끝도 없이 흘렀다. 다시 동네에는 날개를 달은 듯 온갖 소문들이 훨훨 날아다녔다. 난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집을 팔고 곁방살이를 갔다고 했다. 원인은 첩의 씀씀이가 헤퍼서 망한 거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에게 소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행여 바람결에라도 난이 네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소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난이 네가 떠나고 어느 순간 그 많던 소문들은 빗자루로 쓸어 낸 것처럼 사라져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아까시 나무 아래 혼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얀 꽃잎이 지고 향기마저 사라져 갈맷빛 잎새들이 노랗게 이울 때까지. 금방이라도 저만치에서 뛰어올 것만 같은 난이를 기다렸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만남은 없다. 이별은 그리움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토록 긴 그리움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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