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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2.05.1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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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이를 먹고 부모가 되어보면 다 알게 될 거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그때는 몰랐던 그 말씀들을 지천명이 넘어서야 이젠 웬만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자식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 낳고 어머니의 자리에 어머니로 서고 보니 가시처럼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바삐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것 드리고 싶었지만 늘 마음만 끌려가곤 했습니다. 잡은 손 놓친 지금은 당신의 말씀만 주렁주렁 대추나무가지에 매달고 살고 있습니다.

나이 탓일까요. 요즘 들어 부쩍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어머니가 그리워 기일에 맞춰 고향 집으로 향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쪽빛 하늘 아래 긴 장마를 건너온 구절초가 피어 있습니다. 먼 하늘 새털구름 따라 어제보다 한 무더기 더 피어 한창이었습니다. 갈바람에 향이 번집니다. 앞산 소나무도 굴참나무도 몸을 굽혀 연신 내려다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합니다.

어느덧 당신이 가신지도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당신께서 떠나시던 날 밤은 유난히도 밝고 별들이 초롱초롱 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갈 길이 바쁘셨는지 이순을 막 넘긴 나이에 가셨는지요. 삶의 무게가 그리도 버거우셨는지요. 거울 안처럼 비치는 한숨 벤 어제의 삶이 이제는 녹슨 못처럼 가슴속에 발갛게 박혀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의 불의의 사고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한날한시도 마음 편안할 날 없이 밖으로 돌아야 했었지요. 약한 몸을 이끌고 며칠씩 장사를 나갔다가 무얼 잘못 드셨는지 설사병이 나서 되돌아오셨지요. 그때 어머니의 치열했던 삶의 일기장 같았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 날이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린 5남매와 살아내야 했던 고단했던 삶도 억울했던 어머니의 뒷모습은 빛바랜 세월의 몫이었기에 가슴이 더 미어지나 봅니다. 그 눈물은 어머니의 뜨거운 절규의 또 다른 말이었습니다.

몸 한쪽으로만 물집이 생기고 짓물러 따갑고 통증이 심하다는 대상포진을 앓고 계셨던 어머니. 통증이 심할 때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울부짖고 다니셨습니다. 한쪽 머리와 목까지 피부 딱지가 소나무껍질처럼 덕지덕지 눌러 붙어 목숨까지 앗아갔지요. 없는 살림에 자식들 돈 쓸까 봐 병원 입원비 걱정에 집이 더 좋다고 막무가내로 퇴원을 하셨지요. 64세, 지금 같으면 한창인 나이입니다. 다시 돌아오실 수만 있다면 지금같이 좋은 약 좋은 의술로 당신의 병을 고칠 수도 있을 텐데요.

제가 큰아이를 낳고 많이 아팠을 때 저 돌보랴 갓난아이 돌보랴 뛰어다니시던 어머님. 그 큰애가 시집을 가서 어여쁜 딸을 낳아 벌써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하며 재롱부리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럽고 행복감을 준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모쪼록 그 세상에는 아프지도 말고 고생도 하지 않고 자식 걱정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너는 안 늙을 줄 아니, 이마에 닿았어” 하시던 말씀들을 떠올려 봅니다. 어느덧 제 나이도 어머니 가시던 나이가 다 되어가네요.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별무신통 하지도 않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그냥 쓰고 싶은 글이나 쓰며 살려고요. 

인생은 그냥 가는 거라네요. 어떤 시인은 우리의 삶과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소풍 나온 거래요. 또 어떤 소설가는 ‘우물쭈물하다가 여기까지 왔네’라고 묘비명에 뉘우치는 글을 남겼다지요. 인생은 누구나 다 그냥 가는 거래요. 사람도 자연도 그냥 간 것이니까요.

뒤뜰 댓잎이 서걱대는 밤
달빛이 문살을 두드리고
바람의 붓질 소리 스치는
생각의 끝

거기 오래 서 계시던 당신

해마다 오늘이면 오 남매
그때는 몰랐다는
애달픈 어머니의 사연
촛불 켜듯
이젠 이야기꽃에 어린다.

가을바람이 향낭을 여는 밤은
한 겹 한 겹 채운 문풍지로
둥근 달이 뜬다.
                       
기일 날 밤, 삶의 모서리에 묻은 자잘한 멍 자국들을 털어내며 네모났던 마음들이 어머님 앞에 모나지 않게 살자고 어깨를 다독이며 둥글게 살아가자고 재다짐해 봅니다.

자정이 넘은 오늘 밤도 가을바람이 싸하게 문살을 두드립니다. 당신이 떠나던 그날 밤처럼 달도 밝고 별빛도 총총히 떠 무수히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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