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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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김기순 수필가
  • 승인 2022.08.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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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서풍은 밭고랑 사이로 실안개를 모으고 풀섶에서는 귀뚜라미가 또르르 또르르 목청을 돋우었다. 낮에는 토방 아래로 줄지어 개미 장이 열리더니 해 질 무렵에는 제비들이 낮은 비상으로 날궂이 조짐을 보였다. 후덥지근하니 달빛이 붉은 거로 보아 비 올 징후였다. 

하얀 조롱박꽃이 아스라이 졸리운 여름밤, 소녀는 섬돌에 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어둠이 주는 초저녁 완상에 젖어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앉아있니?” 

마실 다녀오던 오빠가 소녀에게 물었다. 

“오빠, 귀뚜라미 소리 아름답지. 달도 예쁘고.” 

소녀는 오빠에게 낭만적인 여름밤을 자랑하고 싶었다. 

“얘는, 무슨 귀뚜라미 소리라고. 비 오려고 지렁이가 우는 거야.” 

소녀는 오빠의 한마디에 식겁하니 말문이 막혔다. 

“오빠, 지렁이가 울어?” 

오빠는 듣는 둥 마는 둥 얼른 들어가 자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저 아름다운 멜로디가 귀뚜라미 소리가 아니라 지렁이 울음소리라니. 소녀의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후 소녀는 귀뚜라미 소리, 아니 지렁이 울음소리를 싫어한다. 

베란다 화분에서 며칠째 밤마다 지렁이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거실문을 닫아보고 TV 볼륨을 높여보지만 찌르르 찌르르 고막을 가르는 소리에 토심이 인다. 

지렁이가 들어있는 화분을 치우려고 이쪽저쪽 귀를 기울여 봐도 어느 화분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막대기로 화분을 두드려보고 물을 뿌려보지만 반응이 없다. 그런 나의 행동을 보고 있던 딸이 왜 귀뚜라미를 괴롭히느냐며 타박을 한다. 딸은 도시에서 듣는 귀뚜라미 소리가 신기하다며 향수에 젖는 눈치다. 옛날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딸에게 이것은 귀뚜라미 소리가 아니라 지렁이 울음소리란다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부전나비 한 마리가 낮 달맞이 꽃잎을 물고 피곤한 듯 앉아 있다. 어디가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알 낳을 곳을 찾지 못하고 날아다니다 지친 모양이다. 화초를 기르면서 가장 골칫거리가 벌레들이다. 화초 잎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작년 여름에도 벌레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나비가 알을 낳으면 큰일이다. 나비를 쫓아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쫓아도 날아가려 하질 않는다. 나뭇잎으로 살살 밀어보고 툭툭 건드려 보지만 나붓나붓 날갯짓만 할 뿐 움직이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살충제를 들고 나오는데 딸이 살충제를 어디에 쓸 거냐고 묻는다. 나비가 알을 낳으면 벌레들이 화초를 갉아먹기 때문에 나비를 죽이려 한다고 하자, 어떻게 저 예쁜 나비를 죽일 생각을 하느냐며 펄쩍 뛴다. 그러지 말라며 마치 나를 죄인 보듯이 바라본다.   

비가 내린다. 거실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가 비를 피해 달라붙어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집이지만 화초를 기르다 보니 매미 뿐만 아니라 벌이며 잠자리도 날아오고 어느 땐 참새도 몰래 들어와 화분을 헤집어 놓고 간다. 매미는 몸을 일으켜 쓰르르 쓰르르 두어 번 울더니 더는 울지 못하고 숨을 헐떡인다. 손으로 잡아도 가녀린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그마저도 멈춘다. 매미의 수명은 일주일이라는데 수명이 다한 매미인 것 같아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자 딸이 보고는 질겁하며 막아선다. 지난번에는 귀뚜라미를 못살게 굴고 나비를 죽이려하더니 또 매미를 버리느냐며 귀뚜라미도 나비랑 매미도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은 인연이 아니겠느냐며 사경을 헤매는 매미를 살리겠다고 호들갑이다. 

‘인연?’ 딸의 한마디가 섬광처럼 가슴에 꽂힌다. 유난히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아이긴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얼마나 야박하고 무정하게 보였으면 저리 북새를 떠는 것인지. 

딸의 말대로 죽음을 앞둔 매미도 늙은 부전나비도 머리 둘 곳이라고 나를 찾아왔더란 말인가. 아무리 각박한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사세난처에서 내게로 발길을 하였다면 거두어야 할 빈객이거늘. 은덕은 베풀지 못할망정 미물이라 하여 그 인연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외면하였단 말인가. 

잠시 후 사라질 이슬방울에 내려앉은 햇살마저도 연연한 인연이거늘, 인연을 맺고 끊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맺을 인연이라면 그 인연은 소중한 것이요 저버려서는 안 될 일인데 나는 그동안 어떤 인연을 추구하였던가. 호사로운 것만을 인연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지, 나 편한 대로 내 방식대로 인연을 맺고 끊지는 않았는지, 이기와 실리에 치중해서 인연이라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만나고 헤어진 사람 혹 미소한 생명체까지도 소홀했을 무지를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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