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공예의 오묘한 광택에 매료된 47년 옻 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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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 공예의 오묘한 광택에 매료된 47년 옻 탄 인생
  • 이성재기자
  • 승인 2016.08.18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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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세계에서 처음 배재대 칠예과 신설
옥천 ‘옻 산업 지역 특구’ 지정되는데 일조
대영박물관·V&A박물관 등 옻칠 작품 전시
정해조 선생과 부인 도경애씨.

▲ “옻 탄다. 옻나무에 가까이 가지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옻나무’하면 떠올리는 말이다. 이런 옻나무에서 추출한 수액을 이용해 만드는 옻칠 공예는 동양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방부성과 내열성이 높아 어떠한 화학도료와 비교가 되지 않는 천연도료이다. 옻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기 때문에 우리 선조는 오래 전부터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도료인 옻칠을 사용해 왔다. 옻칠은 안정된 특성을 가진 화합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외부 습기를 흡수하거나 방출해 항상 일정한 수분을 머금어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생활 용구나 금속기류 등에 옻칠을 하면 표면에 견고한 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광택이 나고 오랫동안 사용해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옻칠은 내구성이 뛰어나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 널리 쓰였다. 예로부터 옻칠은 왕실이나 사대부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옻칠은 수천 년 동안 보존이 가능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능이 있어 귀한 물건을 칠하는데 이용됐다. 

옻칠을 하고 있는 정해조선생.

▲ 대학교 전공 실기 과제로 옻칠과 처음 인연.

옥천읍 대천리가 고향인 정해조 선생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당시 마땅한 그림도구가 없었기에 그는 숯과 곱돌, 나뭇가지 등을 사용해 담벼락과 대문,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정 선생은 삼양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미술로 알아주던 대전 보문고로 진학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미술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정 선생은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하면서 예술가의 길을 들어섰지만 학비와 생활비 마련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휴학하고 군대를 가게 됐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앞둔 그는 고민의 기로에 서야 했다.

그가 다니던 도안과가 도안과와 공예과로 분리되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 선생은 당장 취업에 유리한 도안과 보다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어 공예과를 선택하게 됐다. 정해조 선생이 옻칠을 처음 접한 것은 1969년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다. 당시 전공실기 과제였던 ‘전기스탠드’를 만들면서 단순히 목공예품을 조각하기보다 색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작품에 칠을 할 결심을 하게 됐다. 그런 그에게 담당 교수는 칠공예 공방을 소개시켜 주면서 장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옻칠을 시작하게 됐다.

정 선생은 “당시에는 칠공예에 대한 학과 과정이 전혀 없어 열악한 상황이었다”며 “작품의 일부분에라도 옻칠을 하려면 개인적으로 장인들의 공방을 찾아 다녀야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만들어낸 ‘전기스탠드’가 제5회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것을 계기로 그의 운명은 결정적인 전기를 만나게 됐다. 이후 옻칠의 오묘한 빛깔에 매료돼 47년간 외길을 걸으며 옻칠 공예와 생의 고락을 함께하게 됐다.

영국 2015콜렉트 초대 작품.

▲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옻칠의 표정 제각각.

정 선생의 작품은 아름다운 한국의 전통미를 풍기되 느낌과 정서를 세련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끄러지듯 활기찬 곡선을 타고 힘 있는 빛깔이 요동을 친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초록 등 오방색상은 유연한 곡선을 미끄러지듯 흐른다. 그가 주로 쓰는 제작 기법은 협저태(紵夾胎) 칠기다. 협저태라는 명칭은 모시나 삼베를 지지대 삼아 옻칠액과 함께 굳혀가는 방식을 일컫는 것으로 작품의 크기에 비해 가볍다. 협저태기법은 다른 제작법보다 기술이 까다롭고 어려우며 공정 기간도긴 게 특징이다.

옻칠의 기본 성질에 광택이 있는데 그 광택을 얼마나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작품의 광택이 도드라지고 율동감이 살아 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옻칠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또한 장식을 배제한 담백한 기품과 매끈한 광택을 통해 반사되는 빛의 물결은 보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명도 빛광률, 적광률, 황록광률 등 빛을 테마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정 선생은 “인간의 원초적 감각에서 만들어진 원시 미술을 바탕으로 만든 본체에 오방색 옻칠을 한다”며 “광택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굴곡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 빛이 난반사하면서 마치 광택은 살아있는 듯 춤을 춘다”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이어 “본체가 곡선을 가지게 된 이유도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의 굴절, 율동감, 광택을 돋보이는 것을 추구하다보니 곡선을 이루게 됐다”고 덧붙였다.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작품.

▲ 옻칠 공예를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 그의 평생 꿈.

정 선생은 자신에게 주문하듯 항상 다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잊혀져가는 옻칠공예를 후대에 계승하고 이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늦은 나이에 일본 칠공예의 본고장인 가나자와 미술공예대학 미술공예연구소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가 일본에서 옻칠에 눈을 뜨게된 계기는 우리나라의 경우 몇몇 장인들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옻칠공예가 일본에서는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서다. 정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가나자와 지방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이 칠기로만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나전칠기라는 우리의 대표적인 옻칠 공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옻칠공예와 관련된 산업이 뒤쳐져 있는 것 같아 유학을 마치면 옻칠 관련 산업 육성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때부터 그는 옻칠 공예를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 그의 평생 꿈이 됐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배재대학교 교수가 된 그는 미술학부 안에 칠공예 전공을 만들고 석사과정을 개설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2004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단독학과로 칠예과를 신설하게 됐다. 또 그 해 ‘배재대학교 해조 옻칠 데코아트센터’라는 학교 기업을 만들어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해 판매하면서 국내외에 옻칠의 예술성과 실용성을 알리는데 노력했다. 한동안 소외된 국내 옻칠 공예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 동안 그에게 수학한 600여명의 제자가 옻칠 공예 발전을 위해 예술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d있다. 하지만 2011년 배재대학교는 경제논리를 앞세워 칠예과를 폐지했다. 

한·불 수교 기념 초대 작품.

▲ 옻칠 공예에 대한 기본 토대 정립. 

일본 유학시절 가나자와 지방에서 느낀 옻칠 공예의 산업성을 보고 느낀 정 선생은 1991년 옥천 군북면 국원리에 사비로 옻나무 1500주를 식재해 시범 재배했다. 그의 예상대로 옻나무는 잘 자라기 시작했고 학습용, 연구용 등으로 사용하면서 옥천의 옻나무 재배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에 그는 체계적인 교육과 옻칠 공예 발전을 위해 칠기 제작법과 기술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기 다른 전통 칠기제작기법에 대한 자료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자료를 수집하고, 제작법을 촬영하고, 칠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옻칠 공예에 대한 기본토대를 만들어 정립했다.

아직 논문이나 책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차후 옻칠 공예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2003년에는 옥천군과 배재대가 옻칠 관련 사업으로 자매결연을 하는데 그의 조언이 있었고, 2005년 12월 재정경제부로부터 ‘옻 산업 지역 특구’로 지정받는데 도움을 줬다. 수입에만 의존하는 옻 수액을 조금이나마 공급할 수 있는 계기가 돼 옥천이 옻칠을 이용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 선생은 “현재 수입하고 있는 중국산 옻 수액이 1관(3.75kg) 30~4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국내 유통량의 98% 이상을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수액이 매우 적다. 우리의 전통 옻칠 공예에 수입산 옻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전했다. 이어 “외국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현지 예술인과 전문가들이 작품에 대해 호평 일색이지만 막상 그들이 사용되는 재료를 물어볼 때면 난감하고 위축돼 대답하기 곤란한 적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현재 중국의 옻칠 공예 내수시장은 그리 크지 않다. 중국은 그 동안 옻 수액을 전량 수출만 하고 있지만 향후 중국의 옻칠 공예 시장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옻 수액의 가격은 오르게 되고 우리나라의 옻칠 공예는 위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정 선생은 “우리나라 옻칠 공예가 자급자족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옥천이 옻 특구 지역으로 선정되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며 “식용, 약용등으로만 쓰이고 있는 옻나무가 옻칠 공예를 위해 사용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옻칠 공예 분야에서 손꼽히는 정해조 선생은 2013년 대영박물관과 V&A박물관, 2014년 로스차일드가가 그의 작품을 구매해 전시하고 있다. V&A박물관은 2014년 정해조 선생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해 작품 제작 과정을 촬영하고 해당 영상을 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등 그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그림을 전공한 부인 도경애(63)씨와 장녀 정은진(40)씨가 그의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특히 장녀 정 씨는 칠공예 사업을 병행하며 정 선생의 매니저 역할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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