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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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⑥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8.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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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계약 미 이행은 사실상 구금행위”

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달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집자 주>

 

공작원들이 부대 창설식에서 한 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공군2325부대 ‘오소리공작원 입교식 거행결과 신고서’(1968.5)
1) 본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쇄신분골 헌신할 것과 나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은 무조건 복종할 것이며, 수명사항은 절대 완수하겠습니다.
2) 본인은 입대 복무 중 고의과실을 막론하고 근무이탈은 물론 근무태만 행위를 범하거나 불온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 선동 등 기타 부대에 해로운 일체의 행위를 자행할 경우에는 반 국가행위로 간주하고 군법상의 여하한 극형도 감수하겠습니다.
3) 본인은 입대 복무 중 지득한 일체의 사실은 국가의 최고 기밀임을 명심하고 여하한 경우에도 (재판상의 증언) 타인에게 절대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4) 본인은 입대 복무 중 자기과실, 또는 부주의로 인한 사고로 사망할 시는 자살행위로 간주하고, 이유를 막론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으며 입대 후 도주하는 경우에는 본인들이 연대하여 여하한 책임도 감수하겠습니다.
5) 본인은 이상의 제 사항을 임의로 엄숙히 서약합니다.

모집조건 미 이행 반발 요인

처음 입대할 시는 6개월만 훈련하면 완료된다고 하였으나 파견이 지연됨에 따라 6개월간에 도달하여야 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년 간 연장(69.1.~12.)교육한다고 설득 유도하였다.(국방부 군 특명검열단,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 1971.8.30)훈련기간이 3년이 넘어가게 되자 제1차년도(1968.)는 공작원으로서의 기본훈련과정으로 주지시켰고, 제2차년도(1969)는 교육성과의 미달로 1년간 소기의 공작능력 도달 시까지 교육기간을 연장하며, 제3,4차년도(1070.~1971.)는 장교임관에 필요한 보충교육 기간으로 설득 유도하였다.(국방부 군특명검열단, 1971.8.30.) 강압적인 실미도 부대의 통제시스템을 고려할 때 공작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판단에 의한 훈련기간 연장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일성 거처가 주요 공작목표에서 제외 되었음에도 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어떻게 변경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작원들의 불만 무마책

△조사결과 공작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파견대장은 1970.11.경 공작원들과 면담을 실시하였다.(한총은 공작원들이 6개월 교육이라더니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니 빨리 공작업무에 뛰어들게 해달라고 얘기했고, ‘서신왕래가 왜 안 되냐, 오락시설이 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그들을 무마시켰으며, 공작원들이 표현은 없었으나 급식관계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훈련이나 기합이 지나치리만큼 세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재판기록1권), 공작원들에게 “월급을 왜 안주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으나 시급한 것이 성문제인 듯해 그 문제부터 해결하였다고 진술하였다(한총, 위원회 면담조사, 2006.2.2.). 

△무의초교 강간사건 이후 장기간의 격리 수용과 기약 없는 훈련에 절망감을 느낀 공작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교육대장과 파견대장 등은 공작원들의 하사관 임관이나 공작원들의 사회복귀 등을 상부에 수차례 건의 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김재엽은 무의도 강간사건 후 문관을 실미도에 보내 분위기를 파악케 한 바 공작원들이 “3개월 내지 6개월 훈련 후면 공작 업무 수행 후 사후보장 시켜준다는 것이 3년이 넘어도 아무 통보가 없으니 자신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느냐” 하소연하였으나 당시 보안문제에 신경 썼기 때문에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재판기록1권). 장기간의 격리 수용에 대한 공작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체육관 건립, 특수위안 등을 실시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약속 불이행에 대한 불만 표출

-부대이탈사고 : 이부웅, 신현준의 탈영사건, 강찬주 외 2명의 무장탈영사건 역시 장기간 격리된 채 군으로부터 약속을 이행 받지 못한 공작원들의 불만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판단된다. 

-공작원 정은성 난동사건(양○○, 위원회 면담조사, 2006.1.26.) 1971년 5~6월경 말썽이 가장 많은 C조 소속 정은성이 산악구보를 하다 갑자기 뛰어내려와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주방을 담당하고 있는 기간병 정○○의 뒤에서 칼을 목에 대고 “더 이상 실미도에 못 있겠다, 우리에게 더 이상 훈련을 시키지 마라”며 난동을 부렸는데

-다른 사람들도 훈련이 안 되고 다 내려와 빙 둘러서서 설득을 하자 칼을 던지고 울부짖다 끝이 났는데, 사건 당시 교육대장은 현장에 없었고 아무도 이 일을 교육대장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으며 이틀 후 돌아온 교육대장이 물어본 후

-기간병 2~3명과 소대장 전원이 모여있는 가운데 정은성에게 대검을 던져주면서 “우리의 신조를 범했으니 남자답게 죽어라”라고 하자, 정은성은 손에 들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면서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자 교육대장이 용서를 해주었다(기간병 양○○는 “그때 들려오는 소리로는 모든 탄원들이 거부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사건은 그렇게 묵인되었지만 부대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만 갔다. 누구나 이 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모두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양○○,앞의책)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신분이 군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이들의 신분이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병사의 의무복무 기간이 3년이었으므로 이 기간을 경과하는 기간은 마찬가지로 사실상의 구금행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최초 모집조건인 6개월간 훈련 등의 약속을 위반하여 3년4개월간 실미도 내에 머무르도록 한 것은 이미 개인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적인 행위로 판단되며 국가와 실미도 부대 공작원 간에 최초고용계약이 체결되었고 이 계약이 수차례 걸쳐 연장되었다 하더라도 강신옥 등의 부대이탈 행위 및 사건 이후 공작원들과 훈련종료 요구 행위는 사실상 위 계약을 종료시키겠다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후 국가가 이들을 근거 없이 실미도에 머무르게 한 것은 사실상의 구금행위로 판단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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