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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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⑦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8.25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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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원 수준 유해안치·명예회복 요구”

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달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 집자주〉

 

국가-유족들, 유해 안치 논란
이들 실미도 사건의 충남북 유족들은 지난 23일 경기도 고양시 벽제 시립묘지에 국방부가 마련한 합동제사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이들 유족들은 공작원들의 유해를 호국원이나 현충원의 격에 맞춘 묘소에 안치해주고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으며, 국방부는 이들 공작원들의 유해를 벽제의 국가시설인 납골당 1개 층에 영현비를 세워 안치를 추진하겠다는 의견에 맞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대 해체 및 신분 변경 건의

 한총, 김○○, 김○○, 조○○, 이○○등의 진술을 통하여 파견대장, 교육대장, 교관, 기간병 공히 부대해체 및 공작원 신분변경을 상부에 건의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건의 사항이 수용되지 못한 이유 

△실미도 부대의 설치 운영 폐지는 공군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눈 사항이 아니며 중정의 조정, 감독을 받아야 하므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공군의 조치는 적절했으나 공군의 보고를 받은 국방부장관은 이 문제를 중앙정보부와 협의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실미도부대는 방치된 것으로 판단된다.(정래혁은 위원회 전화면담조사(2006.5.30.)에서 자신은 김두만에게 부대해체 건의를 받은 바 없으며, 책임 회피를 위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루 청와대 대책회의의 존재도 부인하는 등 진술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미도 부대 내에서 재기된 공작원들의 신분변경 건의는 공군 지휘부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에게 떠다른 실망을 가져다주었으며, 공작원들은 중앙유격사령부가 자신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고 배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기간병 조○○은 재판기록에서 ‘공작원들은 자기들의 급여를 교육대장이 임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대우가 점차 나빠진 점에 대한 이유를 교육대장의 능력으로는 공작원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없었으며 공작원들이 침투를 몹시 갈망하였는데 조금만 기다리라는 식으로 미루어 온 교육대장의 말을 신임하지 못했으며 구호를 생략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오히려 강행하는 등 훈련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하였다.

부대 운영 경비의 착복 및 횡령여부

△봉급 및 주식, 부식비는 정보비 명목으로 중앙정보부→ 공군본부→ 2325부대장→ 공작과장→ 209파견과장→ 교육대장에게 지급되었다. △한총과 조○○의 증언에서 당시 지휘라인에서의 예산 착복 정황이 인정되나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못하였다. -공작원 급여를 상부의 지시에 의해 지급치 않고 교육대장이 관리 했다면 김순웅의 사후 현금이나 예금통장이 존재해야 하나 이를 확인할 수 없었고, -주, 부식비의 경우 책정된 예산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었다면 공작원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으나, 공작원들은 배가 항상 고팠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예산의 착복, 횡령이 있었다고 판단한다.(조○○은 위원회면담 조사에서(2005.12.14.) 파견대장 교체 전 김응수로부터 인천 올림푸스(현 파라다이스) 호텔옆 폭포수다방에서 만나 부식비를 현재 받고 있는 금액보다 2배이상 더 받았다고 차기 파견대장에게 허위보고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한총으로 교체된 후 부식비가 2배로 나왔고, 보급품이 많이 좋아졌다고 진술하였다. 진술 생략)

-예산이 대규모로 중간에서 사라지는 상황은 중정(공작단장)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별도의 조치를 취한 바 없고(윤○○는 위원회 면담조사에서(2006.3.14.) 중정 공작단은 공작하는 부서로서 육근HID, 해군 HID, 공군2325를 바로 상대했는데 공군2325부의 경우 부대장이 바뀌고 나서 이거 야단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 예산은 중정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군에 바로 직불되도록 연간책정으로 조치되어 있으며 책정할 때만 중정에서 정해주었는데, 예산 착복에 대하여 질문하자 “뜯어먹어도 그래 후식비, 특수조종비도 안주고, 애들은 보리밥만 먹이고, 공작관은 공작비 떼어먹고. 군은 정보비 떼어 먹는게 실정이야.(중략) 왕창 떼어먹어. 에산의 반은 떼어먹고… 다 떼어먹고있어. 처음엔 애들이(공작원) 잘 먹다가 못먹으니 대장을 만나로 가자고 일어 선거야”라고 진술함으로써 공군관리의 책임을 언급하였다.

예산규모의 연도별 증액과 근거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실미도 부대의 효용성과 이에 대한 중정의 관심이 실질적으로 멀어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예산은 증가하였다. 전년대비하여 1970년은 250만원, 1971년은 140만원, 1972년은 250만원 씩 예산을 증액하는데 실미도 부대 공작원 들의 열악한 ㅜ생활 실태를 감안해 볼 때 증액의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매월 책정된 공작원 급여, 주식비보조금 6만원, 부식비보조금28만8천원을 다른 용도로 전용한 상황에서 예산을 증액한 이유가 실미도 부대의 공작원의 처우개선 등 순수한 목적에서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중앙정보부의 관리 감독 허술 밝혀

△교육훈련은 북파를 목적으로 이뤄졌고 훈련 목표는 북한의 124군 부대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훈련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북한 124군 부대만큼 훈련강도가 매우 높았고 훈련 중 부상도 발생했다. 또한 폭행, 기합, 가격위협 등의 가혹행위가 빈번했고 화장실조차 자유롭지 못했고 항상 무장 기간병들의 감시 속에서 생활 하였다.
△적법한 절차 없이 훈련 기간 중 공작원들이 최초로 살해된 것은 훈련 개시 3개월 여 후 1968.7.로 최초 부대이탈 사고가 발생하자 동료들을 시켜 이들을 살해한 후 상부에 ‘도주사망’으로 보고했으나 중정과 공군 상급 부대는 철저한 진상 조사 없이 이를 묵인, 방조, 은폐하여 이후탈영 시 규율위반 등에 적법 절차 없이 공작원 살해를 재발시키는 원인제공을 하였다.
△3년4개월 간 훈련을 지속한 것은 실미도 부대의 임무변경 및 해체를 책임져야 할 부대 해체 및 공작원 신분 변경에 대한 요구를 상부에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이 제대로 반영 집행되지 못한 것은 8.23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것이었다.
△감독기관인 중앙정보부는 공군에 의한 불법행위를 점검 시정하지 않았고 묵인 방조함으로써 피용자인 실미도 부대지휘관 및 관계자들의 불법행위와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 4명의 피살과 1명의 유기 사망, 나머지 공작원들의 3년 4개월간의 장기간 격리와 집단 탈영과정에서의 궁극적인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을 미연에 막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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