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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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단지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2.12.0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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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참, 또 이게 뭐야! ‘혹시’ 하는 생각에 근 한 달째 전전긍긍하며 시간만 나면 그 앞을 떠날 수 없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골치를 앓는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장딴지에 하얀 곰팡이가 조그맣게 생겼다. 장을 가르려면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혹시 식구들은 물론이고 마실꾼이라도 와서 볼까 봐 뚜껑을 딱 덮어놓았다. 수십 년 동안 살림했다면서 장딴지 하나도 제대로 관리를 못 하는 것 같아 누구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다.

며칠 뒤에 열어보니 푸른곰팡이가 아예 장 단지를 뒤덮어 버렸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푸른곰팡이가 생겨야 장맛이 좋다는 이야기 한다. 아무리 전문가의 말이라 할지라도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장을 담그면 처음에는 빨간색이 우러나다가 차츰 검고 말간 장이 된다. 날짜가 되면 갈라서 간장과 된장을 만들었다. 

그때는 일 년을 두고 먹어도 전혀 곰팡이 같은 것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장맛이 좋다는 소리도 지인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었다.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부터는 담가놓은 장딴지뿐 아니라 갈라놓은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그 불청객은 염치도 없이 찾아온다. 

어느 해인가는 된장 고추장에 낀 곰팡이를 없앤다는 이유로 장을 걷어내다 보니 얼마 못 가서 바닥이 난 적도 있다. 그 뒤부터는 장 담그기를 포기하고 이집 저집에서 얻어다 먹든지 아니면 사다 먹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니 또다시 장 담그기 시작했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잊어버리지도 않고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기는 했지만, 지난해에 했던 경험이 있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날짜가 다 되어 장을 갈라 달여서 식힌 후에 병에다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담아놓으니 병폐가 없다. 된장 단지는 위에다 소금을 하얗게 뿌려 그놈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었다가 익힌 뒤에 김치냉장고를 이용하니 온도가 잘 맞아 그런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고추장 단지는 어떻게 할 길이 없어 위험하다는 남편의 말을 어기고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화분 걸이에 내어놓았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괜찮았다. 이제 장에 대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비 오는 날만 주의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뚜껑을 덮으려고 베란다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고추장 단지가 아수라장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넘친 것인지 엎질러진 것인지 단지가 고추장을 뒤집어쓴 채 난장판이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내어놓아 누군가 내가 없는 사이에 들어와 잘못 건드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따지듯이 물었더니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 끊으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혹시 윗집? 설마? 그럼 우리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 누구누구더라’ 주위 사람들을 돌아가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잘 닦아서 다시 그곳에다 내어놓고 다음 날 외출을 했다. 돌아오니 또 그 지경이 되어있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이야기 했더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자기도 의아하다면서 잘 지켜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한테 원한 살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 좀 해보란다. 남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며칠 후, 깨끗하게 닦은 고추장 단지를 또 그곳에다 내어 놓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의심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난데없는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고추장 단지에 앉는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럼 저 까치가?’ 긴장되었던 마음이 허탈해지면서 한꺼번에 수수께끼가 풀렸다. 하도 기가 막혀 어떻게 하면 까치를 혼내줄 수 있을까 궁리해 보았지만 별 묘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묘책을 찾기 위해 친구를 만나 고추장 단지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아유 까치가 얼마나 매웠을까? 어디 가서 물이라도 먹었으려나?” 의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글을 쓴다면서 그런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고 까치에게 복수할 생각만 했으니, 나는 그 친구의 살아있는 감성에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난데없는 까치의 등장에 눈으로 보지도 않고 남을 의심하는 죄를 지은 생각을 하니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사립문 밖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괜스레 기분이 좋아 올 사람도 없는 동구 밖을 바라보며 누가 오려나 해가 지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지금도 어쩌다 까치울음 소리가 들리면 행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길조로 알고 있는 까치가 우리 집 고추장 단지까지 접근했으니 머지않아 기다리는 미지의 귀한 사람이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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