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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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령산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3.05.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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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장소가 필요하다

사회가 발달하고 정신문화가 성숙하려면 가장 깊게 자리 잡아야 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토론의 장소’다. 

여기서 말하는 ‘토론의 장소’란 퇴근 후 삼삼오오 모여 소주잔 기울이며 남의 욕이나 하고 없는 말 만들어 내는 그런 시시껄렁한 선술집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역사회를 걱정하고 사심은 접어둔 채 오로지 공익을 위해 고민을 하는 그런 사교 집단을 말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유럽. 당시 유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정치적 정신적 격동기를 맞고 있었다.

오랜 세월 왕정에 길들었던 백성들은 자신들이 끌어낸 새로운 시대에 갈팡질팡했고 당황해했다. 심지어 프랑스혁명으로 새로운 자유의 시대를 불러온 사람들 자신도 나폴레옹의 등장에 박수를 보내며 가까스로 얻은 자유를 자진해서 헌납하기까지 했다.

특히 무엇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인가를 매일매일 질문당하고 살아야 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만남과 토론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담 스탈이 운영하는 살롱에 모여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고 밤을 새워 가며 토론하고 내일을 걱정했다.

통상 마담 스탈로 불리우는 이 여성의 정식 이름은 안느 루이즈 제르맹 드 스탈 홀슈타인이다. 주불 스웨덴 대사의 부인이기도 한 스탈은 격동기 프랑스 살롱의 대표적인 안방마님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운영하는 살롱에는 파리에서 내로라하는 학자와 시인, 예술가들이 쉼 없이 드나들었다. 그만큼 스탈 살롱은 당시 프랑스 문예 살롱의 중심이자 토론문화의 산실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스탈에게도 위험이 다가왔다. 초기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마담 스탈은 혁명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귀족인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자 잠시 살롱을 접고 스위스 코페로 물러난다. 나름대로 사회변혁을 주장했던 그녀였지만 혁명이 자신이 속한 계급을 위협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스위스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자 마담 스탈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살롱의 문을 연다. 이때도 이전의 살롱처럼 마담 스탈의 살롱에는 정치적인 사람들이 모여 토론의 꽃을 피워 나갔다.

이제 마담 스탈은 프랑스 살롱의 안주인에서 벗어나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는 유럽의 지식인 전체를 상대로 하는 문예와 정치적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19세기 초 프랑스는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한 명은 군인 나폴레옹이며 다른 한 명은 그런 나폴레옹을 반대하며 일어서 전 유럽 지식인들을 매혹시킨 ‘마담 스탈’을 앞세우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옥천이라는 지역사회에서 격의 없이 토론할 장소는 없는 걸까. 누가 누구를 질시하고 폄훼하는 그런 토론의 장이 아니라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장소는 없는 걸까.

주지하다시피 옥천이라는 시골이 인구소멸지역으로 진입한 지 오래다.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대한민국 행정구역에서 옥천이라는 명칭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아무리 공무원 조직 내에 인구팀을 만들고 머리를 써봐야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바로 모든 군민이 언제든지 모여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토론의 장소’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아는가, 마담 스탈처럼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나와 인구문제에 대한 통쾌한 해답을 던져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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