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넘어가는 풍조
상태바
적당히 넘어가는 풍조
  • 최성웅 전 충북경제 주필
  • 승인 2016.10.06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적당히’ 라는 말을 흔히 쓴다. 적당하다는 말은 본래 알맞게 마땅하다는 뜻으로 알고 있으나 언제부턴가 그와는 달리 대충 우물쭈물 얼렁뚱땅 건성으로 넘어가고 눈가림하는 것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적당히 하자는 것은 눈치껏 힘든 길을 비켜가자는 뜻이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어렵고 귀찮으니까 굳이 그렇게 할 것 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물건 하나라도 치수를 꼼꼼히 재고 빈틈없이 만들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말 한마디라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해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치수는 어림잡아 맞으면 되고 말귀는 대충 알아들으면 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걸 따지면 좀스럽고 답답하며 고지식한 이가 되고 얼렁뚱땅 넘어가야 통 크고 시원스럽고 융통성이 있는 이가 된다. 이치를 적당히 넘어가자는 것이며 도리를 모르는 채 비켜가자는 것이다. 이치에 어긋나면 무리요 도리를 벗어나면 비리가 된다. 그럼에도 적당히 하자는 말이 통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무리와 비리를 묵인하고 공조하는 풍조가 있다는 말이 된다.

잘못된 일에 대해 괜찮다거나 좋은 게 좋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리를 행하는 쪽이나 그것을 보는 이가 그것을 괜찮다고 하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부당하게 더 큰 손해를 본다. 무리와 비리는 건전한 기풍을 해하고 삶을 고달프게 만들어 도처에서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그로인해 우리 사회는 여러 부분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리사회는 무리와 비리에 관한 예는 많이 있다. 건물이나 다리가 부실하게 건설돼 여기저기서 무너져 내리고 어림잡아 파 들어간 탄광의 갱도가 무너지고 공사기간을 무리하게 줄이려다 철도선로가 내려앉고 열차가 탈선한다. 비행기와 선박이 기상상태와 정원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운행하다가 추락하고 뒤집어진다. 교통규칙을 무시하고 난폭운전으로 자동차 사고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한다. 마구잡이로 연결한 전선들이 과열 합선되어 해마다 큰 불이 난다. 우리는 그 원인과 대책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눈앞의 이득 때문에 위험을 눈감아주고 방치한다.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해놓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요행을 바라는 가운데 비슷한 사고가 거듭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거리질서 확립이라는 시민운동을 자주 벌이고 있는데 대개가 신호지키기와 줄서기 정도다. 그런데도 해마다 거듭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관청의 급행료, 공연장의 암표, 정거장의 새치기, 자동차의 끼어들기 이런 무질서는 공공장소 어디서나 관행처럼 되어 있다.

서로 내가먼저 하기 위해 머리를 디밀고 팔꿈치로 밀친다. 제 집안은 청결하면서 바깥은 아무렇지도 않게 더럽히고 어지럽힌다.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떠들고 볼썽사나운 행동을 하면서 남의 불편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난 괜찮아’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 하나는 남을 위해 나를 돌보지 않는 헌신적 태도다. 다른 하나는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이기적 태도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사회는 역설적인 후자 쪽으로 더 많이 쓰고 있다.

해방 후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정부는 부정부패를 일소한다고 했다. 그때마다국민의 공감을 얻었고 그만큼 기대를 모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지위와 권한을 악용해 이익을 챙기는 일이 허다하다. 부정축재, 정경유착 등의 말이 귀에 익고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절규가 공감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를 보더라도 부정선거와 타락선거는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촌지라는 좋은 말로 포장된 뇌물은 관청과 기업은 물론 군경과 법조, 학교와 병원, 교회와 사찰, 묘지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횡행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속에서 성역까지 위아래 할 것 없이 생과 사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정상적 절차를 휘젓고 있다.

훗날 어떻게 되건 약한 쪽을 짓밟고라도 자기 편리한 대로 이익만 챙기는 행동은 비록 법은 어기지 않더라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마음을 염치라고 했다. 염치없다는 말은 요즘은 자주듣기 힘들다. 그만큼 몰염치한 행동거지가 흔해졌기 때문이다.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염치를 회복해야 한다. 강자의 염치, 부자의 염치, 배운 이의 염치, 윗사람의 염치, 어른의 염치 등으로 염치가 있음으로써 예절이 있다. 예절은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절은 윤리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예절이 항상 형식이라고 해서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운 것으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법과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