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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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주인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4.06.1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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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떨구는데 햇살은 무슨 미련인지 백사장에 가로눕는다. 미처 자리를 털지 못한 여행객을 황금빛 옷으로 치장한다. 내가 쌓고 있던 모래성도 금빛으로 일렁인다. 순간 더욱 욕심이 난다. 꿈꾸어 온 동화 속 세상을 만들고 싶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쌓고 허물기를 수차례, 이제야 겨우 터를 닦았다. 한 줌한 줌 터널을 파듯 기초 공사를 한다. 걷어낸 모래는 지붕을얹기 위해 한곳에 모아 둔다. 나머지 필요한 모래는 다른 곳에서 공수해 온다. 담을 쌓고 지붕을 얹기 시작한다.돔 형식의 웅장한 집을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더욱 단단하게 하중을 받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뼈대 없이 둥근 지붕을만들기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다. 모래가 서로에 의지해 담으로 거듭난다. 단단하게 뭉친 모래는 양쪽에서 뻗어와 지붕한가운데서 두 손을 맞잡는다. 웬만한 밀물에는 끄떡없을 만큼 강한 지붕이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웅장한 외형에 어울릴 만한 멋스런 공간을 창조하고 싶다. 깔끔한 주방에 유화 같은 거실을 만들 참이다. 리플 달린 침대가 있는 나만의 방도 염두에 두었다. 한껏 꿈에 부풀어 있는데 물놀이에 여념이 없던 친구가 달려오더니 꿈의 성을 그만 짓밟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망연자실했다. 꿈과 열정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친구를 향해 돌진한 주먹을 어떻게 다시 들여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친구의 이름은 오롯이 기억한다, 새삼스럽게 나의 오늘이 그때 쌓던 모래성을 닮은 것 같아 불안하다. 믿었던 절대자와 현인들의 해박한 논리, 사랑과 현실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기분이다. 인류는 긴 세월을 거쳐 탄탄한 논리를 정립하고 안전한 구조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우쭐거렸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워 관계망을 만들고 탄탄한 문명을 일궈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게 원시의 공간으로 돌아가려 한다. 쌓아온 논리가 무력하여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성이 무너져 내려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친구가 망쳐버린 모래성을 닮은 운명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짓다가 만 반쪽짜리 공사장이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은 폭탄세일, 원 플러스 원, 낮은 이자율, 심지어 집도 반값에 주겠다고 꼬드긴다. 사는 자나 파는 자나 남의 행운을 가로챌 기회만 엿보고 있다. “제발 날 좀 구해달라.”고 내지르는 아우성이거나 처참한 현실을 견디느라 목놓아 우는 통곡처럼 들린다. 컴퓨터 켜기도 두렵다. 스크린 안에서 많은 사연이 우후죽순 얼굴을 내민다. 가려 읽고 싶지만, 자극적인 화젯거리를 피해갈 수 없다. 고혹적인 자태로 때로는 직설적인 어법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단식투쟁, 모 지검장의 성도착 행위, 지진과 산사태로 무너진 집과 건물 더미들. 헤아릴 수 없는 사건이 자고 일어나면 스크린을 도배하지만, 모두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왜 철심을 박은 듯 가슴이아픈지 모르겠다. 돌아앉아도 여전히 궤도를 이탈한 열차 속에서 찢기고 얻어맞다가 끝내 멈춰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절망은 기어이 끝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길을 연다. 죽은 듯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난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생각이 드는 사실이 놀랍다. 어디선가 반가운 음성이 들려온다. 삶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부드러운 손길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처진 어깨를 토닥인다. 문득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후부터라고 고백한 어느 시인의 시구가 길을 열어준다. 바닥 치기는 날아오르기 위한 도움닫기였던가. 끝에 서니 미래가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내리막길은 끝났다. 이번에는 산허리를 감아 돌며 천천히 오르리라. 서 있는 이곳이 고지라 여기면서 한가롭게 거닐고 싶다. 어느새 세상은 동해 깊은 바다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닮았다. 주변이 활기를 되찾는다. 아침 산책을 나온 가족인가 보다. 까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잰걸음이다. 다리가 짧은 막내는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어가족의 대화에 끼려고 안간힘이다. 오늘을 계획하며 행복에겨워하는 그들의 얼굴이 연한 복숭아를 닮았다. 잿빛 세상은 어느새 연둣빛으로 넘실거린다. 내 마음도 덩달아 두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다. 내 안에는 나도 어쩌지 못하는 또 다른 주인이 살고 있나보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하루를 밀어내면서 살고 싶지 않다. 내일은 꿈일 뿐 오늘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데 미지의 내일을 계획하면서 오늘을 허비하곤 했다. 현금인출기처럼 당장의 행복을 안겨주는 오늘을 위해 축배를 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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