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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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을 꿈꾸며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7.0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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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성기를 보낸 추위는 기세가 꺽이어 골짜기를 내달리고 있다.

자연의 법칙을 배우기 좋은 이 봄, 어느새 결혼 38주년이 되었다. 내 나이 또한 지천명을 지나 이순에 접어들고 있다. 해묵은 시간이 날을 세우며 고개를 든다. 몇 해 전 겨울의 냉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은 1년 동안 꼼꼼히 준비 해왔던 새로운 꿈인 신재생 에너지 태양광 시공 준비에 분주하다. 육십 평생 맑은 향기를 가슴 넘치도록 채워주고도 더 주고 싶었던 남편은 전국을 오고 갔었다. 견학하고 책을 사서 밤낮을 공부했다. 그렇게 삼백육십 오일을 건너 새 꿈인 허가증을 받아들던 날, 기쁨의 미소는 봄 햇살만큼이나 화사했다.

그해 봄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땅을 파고 등으로 받치고 무릎 뼈를 깍아 생의 기둥을 세웠다. 비울 것 다 비운 몸통에서 마지막 푸른빛을 뽑아내어 거미줄처럼 전선을 엮어 나갔다. 남편은 가난의 대물림이던 농군이 천직이며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열심히 살았던 칠남매 맏이로서 까칠한 삶의 끝자락에서 인생 2막 마지막 희망을 그리고 있다.

감기도 한번 앓아보지 않았던 남편의 몸에 이상의 붉은 신호가 생겼다. 별 징후를 느끼지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이물질이 관을 좁혀온 것이다. 몸속애서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먹고사는데 급급하였으니, 아침부터 두세 시간이면 된다던 수술이 여덟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발병한 그 부위만 제거하는 수술이니 걱정하지 말라던 의사의 말은 거짓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겼는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의 여덟 시간은 평생을 겪은 힘든 시간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 여덟 시간 이후 1년간 내몸은 파스가 늘 붙여 있었다. 불면증과 한약방 문턱이 다 닳았다.

모니터엔 ‘수술 중’ 이라는 전광판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오후 늦게 돼서야 수술이 끝난 남편의 아랫배에는 조막만한 빨간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수술 후 분술물의 피가 고이는 주머니였다. 절망적인 위기감 속에서 가슴이 천 길 만 길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을 텐데, 절망감과 두려움 앞에서도 가장 먼저 아내인 내가 생각났다던 남편, 돌이켜 보니 잘해준 것도 없고 맘고생 몸고생만 시켰기에 미안함이 컸다던 남편, 만일을 생각해 당신이 없어도 남아있을 아내를 위해 태양광 사업이라도 만들어 편안한 노후를 보장해 주고 싶었다던 남편의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기만 하였다.

처자식을 위해 막다른 길로 내몰리던 그가 새길 찾게 되어 감사하기 그지없다. 만물도 봄기운을 받아 꿈틀거린다. 남편은 봄기운이 들썩이게 하는지 태양광 에너지 시공에 새벽부터 밤까지 콩죽 같은 땀을 흘렸다.

그해 봄은 유독 아름다웠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살면서 무엇보다 마음 하나 내려놓는 일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운명이 삶을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마음 하나 내려놓으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던 사람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 지난 세월과 남편과 남은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6개월의 긴 시간의 뒤란은 또 하나의 인생 2막 여백에 음각이 양각으로, 전기의 스위치가 올려졌다. 온 세상이 다 환하게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요즘도 남편은 틈만 나면 태양광 기계를 닦고 살핀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의 건강에 노심초사이지만, 긴긴 세월 쌓이고 쌓인 삶의 무게를 털어내며 식이요법 등 몸 관리에 최선을 다하리라. 인생의 운명이 내일 다할지라도 절대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햇살 고운 새봄, 새 희망의 에너지 태양을 품어 안고 젊음의 시절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랑으로 극복해 완쾌될 날을 기대해 본다. 

훈풍의 바람이 살랑인다. 앞뜰 만삭의 산수유가 막 산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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