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영주의병장, 부친상에 2달만에 사퇴
김개국(金盖國) 군수는 1548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1603년에 생을 마친 조선 중기 문신이다. 그는 1601년 옥천군수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고향 영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공을 세웠다.
그의 본관은 연안 김씨이며 자는 공제(公濟)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 양진재, 노봉 세 가지 호를 가졌다. 아버지는 김산(金山: 김천지역) 훈도를 지낸 김몽득이며 어머니는 진사 이극온의 딸로 공주 이씨(公州李氏)이다. 조부는 가인의를 지낸 김복흥이며 증조부는 충순위 김세형이다. 부인은 증참의 김부민 딸로 예안김씨이다.
만취당 김개국 군수는 박승임(朴承任)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1573년(선조 6년)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5리 밖에 있는 묘소를 조석으로 성묘하였다. 그는 1591년(선조 24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난 영주 의병장 추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영주 사람들은 김개국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년)에 강원도도사로 부임, 당시 강원도관찰사였던 정구(鄭逑)와 뜻이 서로 맞아 함께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1596년 예조좌랑에 제수되었고, 1598년(선조 31년) 충청도도사로 부임하였는데, 병환으로 업무를 보지 못했던 관찰사 대신하여 명나라 군을 조리 있게 대우하고 군무를 잘 다스렸다.
▶부친상으로 두달 만에 사퇴, 백성들 울면서 떠나보내
김개국 군수는 1601년(선조 34년)에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 관직을 구해 옥천군수로 부임하였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2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재임했었지만, 선정을 베풀어 고을을 떠날 때 백성들이 울면서 보냈다고 한다.
▶『만취일고』등 일록과 일기
그의 문집으로 2권 1책의 『만취일고(晩翠逸稿)』와 일기로 『만취선조관동일록』과 『만취선조예조일기』가 전해진다. 『만취선조관동일록』은 1596년(선조 29년) 1월 19일부터 1599년(선조 32년) 2월까지 약 3년간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특히 『만취선조관동일록』은 임진난 막바지와 전쟁이 끝난 직후 충청과 전라도 지역의 실정과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1605년(선조 38년) 4월에 선무원종공신에 녹훈,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고 1650년(효종 1년) 효행으로 승정원의 좌승지에 추증됐다.
1714년(숙종 40년) 영주 삼봉서원에 김개국(金盖國), 김륭(金隆) 선생이 추가 배향되었다. 만취당은 영주시 이산면에 김개국 군수가 1587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이 정자의 편액이다. “만취(晩翠)”는 정자 앞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 송림이 푸르름을 잃지 않음을 보고 지은 것이라 한다.
이는 바로 ⌜소학⌟의 “더디고 더딘 시냇가의 소나무는 늦도록 푸른빛을 머금고 있다(遲遲澗盤松 鬱鬱含晩翠)”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