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의 정지용詩 다시 읽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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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의 정지용詩 다시 읽기(13)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6.11.1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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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인 . 문학박사

향수, 고향 황톳빛 짙은 농촌의 정감을 안겨주는 주옥같은 시로 ‘현대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하는 공간을 마련한다. 본란은 현대어로 풀어 놓은 시와 해설을 겸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매주 게재되는 ‘다시 읽는 정지용 시’를 어느 덧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이를 느끼게 된다.                                         <편집자 주>

 

옛이야기 구절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골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끊이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시인이 일본 동지사대학 재학 중인 1925년 4월에 쓴 것이다. 이 시에서 고향은 집을 떠나서 겪은 생활의 고달픔과 서러움으로 드러나고 있다. 「향수」에서 느끼는 ‘집’의 의미와는 다른 곳이다.

정지용은 어려서부터 10여 년 동안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있었다. 이 작품은 바로 열네 살부터 고달픈 객지생활을 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인은 새벽닭이 울도록 ‘아버지’ 앞에서, 눈물 고이신 ‘어머니’ 앞에서, 문설주에서 서서 듣는 ‘아내’ 앞에서, 밤새도록 설움 많은 타국 생활을 이야기 한다. 밤마실 온 동네사람들도 돌아서서 같이 울고 웃는다. 시인은 착하디착한 고향 마을사람들의 순박한 정과 가족 삶의 모습에서 고달픔과 상실감을 느낀다.

주된 정서인 서러움과 고달픔은 ‘고달펐노라’가 암시하는 것처럼 집을 떠나서 겪는 갈등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심리적 단절감은 고향을 찾아오는 논둑길에서 부르는 서러운 노래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마을공동체는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온 원형적 체험을 빼앗아가는 상실의 요소로 작용하고있다. 하여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친숙한 이웃과의 만남은 ‘큰 독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서러울 뿐이다. 이제 고향은 삶의 내용을 채우는 풍요로운 세계가 아닌 상실감을 다시 환기시키는 공간으로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혈연과 지연으로 형성되는 고향의 정취를 담고 있는 것들, 즉 ‘기름불’, ‘집’, ‘문고리’, ‘지붕’, ‘아버지의 수염’, ‘밤하늘’ 등에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고된 생활을 떠올릴 수 있는 시인의 섬세한 시선은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돌아서서 듣고’, ‘시원찮은’ 마을사람들에게 옮겨진다.

고단한 삶은 개인의 서러운 역사인 동시에 친숙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억이 된다. 이처럼 고통을 함께 치유하도록 이끄는 시적주체의 태도는 인내의 자세인 것이다. 그러기에 마을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 속에서 유토피아적세계를 꿈꿀 수 있기를 갈망하게된다.

정지용에게 고향은 과거를 대상화하는 역사적 시점이다. 전근대적인 고향의 현실을 민족의 고향으로 인식하는 고향상실과 향수의감정은 당시 보편적 정서의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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