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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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연가
  • 배정옥
    시인, 수필가
  • 승인 2017.03.02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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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내렸는지 지상은 이미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거대한 캔버스를 펼친 듯하다.
잿빛 하늘은 하고픈 말들이 저리 많은지 수많은 언어를 함박눈으로 펑펑 내린다. 흰 약처럼 쓰디 쓴 고백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출근길에 차 앞 유리창 와이퍼는 분주히 움직인다. 바짝 언 가로수 나무들이 겨우 숨을 고르는 37번 국도길, 눈보라 성긴 바람이 연신 차길을 쓸어댄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북설 바람에 눈꽃이 파도의 흰 거품처럼 또로록 말려 따라간다. 길마다 차량들은 거북이 걸음으로 느릿느릿하다.
근무지 장계관광지에 도착하니 내리던 눈발이 할 말을 다 했는지 작아지고 있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새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사무실 앞 느티나무 가지마다 흰 눈꽃이 활짝 피어 환호하듯 서있다.
이곳 장계리 향수 30리, 구읍에서 12km 떨어진 멋진 신세계는 시인 정지용의 시 문학 세계를 해석, 공공 예술로 빚은 아트벨트다. 금강줄기 상류에 위치한 시 문학 공원으로서 시와 자연과 더불어 시인의 원고지가 생각나는 모단광장이 있다. 시판에는 시인의 삶과 문학을 향수 별자리로 표현해 놓았다. 시인의 연보 및 지용 문학상 등을 볼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일곱 걸음 산책로와 대청호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시를 감상 할 수 있는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창밖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신선한 바람이 일었다.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시인정지용의 시 ‘꽃과 벗’ 시어 중 ‘일곱 걸음’의 시어를 따 인용한 산책로로 발길을 잡았다.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겨울 연가를 노래하는 듯하다.
대청호 맵찬 바람은 꼭꼭 여민 옷섶을 사정없이 헤집고 내 뺨을 따갑게 내려친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싸목 싸목 신발 앞 코에 눈꽃이 묻어난다. 지용 선생의 오월 넥타이 시어처럼 휘어진 산책로 길이 앞장을 섰다. 흰 양탄자위에 발자국이 따라 움직인다. 꽃무늬, 세모네모 그림을 그렸다. 모양이 지용문학상 시비와 어우러져 마치 설치 미술 작품과 같다. 바람이 불때마다 줄지어 선 나목의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꽃이 하얗게 날린다.
이 은빛 적요에 흠뻑 취해 미끄러질 듯 비틀거리며 걸었다. 꽁꽁 얼어붙은 금강, 대청호도 따라 나선다. 강변의 잔설이 곱게 펼쳐져 눈이 시리다. 가슴까지 와 닿는 시린 순수 백야는 태고의 정적을 담은세상에서 겨울의 꿈을 꾸는 듯하다. 주변 풍경이 시처럼 읽혀있다. 침묵에 잠긴 나무도 강물도 칼바람이 불어와 꽁꽁 묶어둔 채 시간마저 동여 매어놓은 듯하다.
한겨울 무거운 날씨에도 끊어질듯 이어지는 인적의 발걸음에서 겨울 이야기는 반복된다. 마치 수묵화의 풍경화 속에서 튀어나온 한 폭의 설경이다. 맑고 청청한 물과 향수의 고장 금강에서 시를 찾고 시성을 읽게 된다. 이는 한 시인의 삶에서 쉼을 찾고 지친 회색 삶을 내려놓고 싶은 이들이 이곳 금강으로 모여든다.
산책로 바람의 웅얼거림을 들으며 산책로를 걷고 있노라니, 강변에는 허리굽힌 갈대와 억새들이 등을 돌려 맵찬 바람을 가르며 연신 주억인다. 폭설에도 끄떡없는 이들의 호기에 내 기가 주춤한다. 머지않아 저들의 호기도 곧 사라질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모습일 뿐 삶과 죽음은 한 폭의 그림이다.
강물과 함께 얼어붙은 선착장에 묶여있는 고깃배가 강가의 오종종 한 무리의 갯버들과 함께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묵언에 잠겨 있다. 손끝에 시려오는 혹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대청호의 깊고 넓은 큰 품에 안겨 훈풍의 따뜻한 새 봄을 기다리고 있다.
오후가 되자 찬바람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지난 가을 떨어진 몇 잎 남은 낙엽을 훑고 지나갔다. 그 뒤를 한풀 꺾인 동장군의 등이 저만치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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