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논단
정지용과 사람들
상태바
정지용논단
정지용과 사람들
  • 김묘순
    수필가.시인
  • 승인 2017.04.06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지용이라는 현대문학의 거대 담론을 담은 지용제. 이 문학행사를 옥천은 30년째 맞이하고 있다. 빼어난 시인 정지용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여 본다.

지용제는 어느 날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지용제가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지나갔다. 물론 그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을 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갈등은 오롯이 정지용을 향한 바른 마음이었기에 앙금으로 남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1988년 3월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납·월북 문인 중 먼저 김기림의 작품과 함께 해금을 맞은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사상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판단에서이다. 이는 영원히 매몰될 위기에 처하였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문학의 본령을 지키기에는 힘들었다.

해금이 되기까지는 지용회, 문학과 문화계 관계자, 유족, 지역 인사, 지용을 사랑하는 사람 등의 눈물겨운 고난이 뒤따랐으리라. 고마운 일이다.

해금을 맞고 그해 지용제가 치러졌다.

1988년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지용제가 열린다. 당시 박효근 옥천문화원장 등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후 박 원장의 두툼한 포부와 용감한 능력으로 그해 6월 25일 옥천에서 지용제를 치르게 된다. 한해에 2번의 지용제를 서울과 옥천에서 치른 것이다.

1989년 5월 14일 옥천에 「향수」시비가 제막된다. 아마 옥천에 정지용 시비로는 가장 먼저 들어섰지 싶다. 당시 시비에 쓰일 바위를 속리산에서 몰래 들고 왔단다. 「향수」시비에 썩 어울릴 것 같은 자태를 지닌 바위. 그 바위는 박 원장의 눈에 띄었고 그는 속리산국립공원에 가서 시비에 쓰일 바위를 ‘훔쳐왔다’며 그 시절을 회상할 때가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정지용 시비에 대한 절박성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깊고 절실한 소망 앞에 용기가 더하여 관성회관 좌측에 평보 서희환의 서체로 「향수」시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렇게 지용제는 나이를 먹어갔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나이테를 새기며 해를 거듭할수록 빛이 났다. 지용제도 이젠 어엿한 성년이 되었다.

정지용은 영일정씨 정숙공파 19세, 이의공파 18세로 태어난다. 한편 정철은 정숙공파의 고손, 김제공파 증손으로 분류되어 이를 수정·보완한다.(3월 9일 11면 「정지용의 탄생과 내력」) 이와 관련, 도움주신 정창영, 정진국, 정우용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정지용은 연일(延日)이 아닌 영일(迎日)정씨로 기록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일(延日)과 영일(迎日)로 적어도 무방하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10대~60대 사람들에게 질문한 바에 의하면 혼용해 써도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60대라고 밝힌 정창영 씨는 “연일(延日)과 영일(迎日)이 혼합되어 쓰이다가 (정확한 시기는 기억할 수 없지만) 중앙에서 영일(迎日)로 표기하기로 하였다”며 “연일(延日)로 적는 것은 옳지 않다”고 조언하였다.

영일정씨 정숙공파 회장(2010~2012)을 역임한 정진국(75·옥천읍)은 “행정구역 개편과 영일(迎日) 정씨 세보에도 ‘延日’이 아닌 ‘迎日’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영일(迎日)로 표기함이 옳다”고 하였다.

1752년 최초본을 영인하였다는 󰡔迎日鄭氏世譜󰡕(국학자료원, 1993. 4. 20.)에도, 2014년에 펴낸 󰡔迎日鄭氏世譜󰡕에도 ‘연일(延日)’이 아닌 ‘영일(迎日)’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로보아 ‘영일(迎日)’로 표기하여야함이 훨씬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지용 연보의 80%이상이 연일(延日)로 적고 있었다. 학계와 정지용 연구가들이 여전히 주의를 기울여야할 부분으로 남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