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주최 ‘1회 수기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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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주최 ‘1회 수기 공모’
  • 천성남국장
  • 승인 2017.04.0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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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박근석 · 우수 송미경

옥천향수신문(대표이사 최장규)이 주최한 ‘1회 수기공모’전에서 지난 호 대상 수상작에 이어 이번 호에는 최우수, 우수작품을 게재한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근석(52·옥천읍 삼양리), 우수상 송미경(51·동이면 평산2길)씨의 작품은 잔잔한 글로 읽는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수기 공모는 지난해 12월 1일~올 3월 20일까지 4개월간 진행된 것으로 모두 45편의 원고 중 7편이 예심을 거쳐 최종 3편이 선정됐다.

이번 공모전은 지역민의 창작열을 고취시키고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가꿔가기 위해 마련됐으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인생을 아름답게 극복한 인생스토리를 담아낸 사람에게 영예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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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수상작

살다보면

박근석(52)씨

대리석 바닥에 유리병이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듯 내 몸이 그랬다. 혀는 빳빳하게 굳어 말리고 얼굴은 물론 몸 전체가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하며 비비 말렸다. 이내 심장이 쥐어짤 듯 쪼이더니 호흡이 거칠다. 흐느낄 시간 없이 고됐던 삶. 오늘까지였다.

아들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대학병원으로 전화한다. “엄마 사지가 뒤틀리는데 수술 후 처방약 없는 거 맞습니까.” 아들 목소리가 이웃집에서 이야기하듯 멀게 들렸다.

6월이었다. 나는 2년에 한 번씩 국민건강보험에서 시행하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그곳은 4년 전에도 2년 전에도 건강검진 때마다 위에서 폴립을 한 개씩 떼었기에 친정처럼 편하지는 않아도 시댁처럼 어렵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걱정이라면 요즘은 잠자는 시간마저도 피로가 나를 지배했기에 접수하고 순번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간호사 호명에 누가 보거나 말거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꼭 쥐고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잔기침에 말아 꿀꺽 삼켰다.

평소 내 몸을 소홀히 했기에 죄인처럼 고개도 바로 들지 못하고 이쪽에서 엑스레이 찍으라면 찍고 저쪽 가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하라면 했다. 간호사가 가까이 오더니 소곤대듯 간과 갑상샘 초음파는 공단에서 지원하지 않는데, 할 거냐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위내시경 하기 전 간과 갑상샘 초음파 검사를 했다. 간은 지방이 있고 감상샘은 기분 나쁜 혹이 한 개 보인다며 2차 기관에서 CT를 찍을 수 있는 소견서를 써주었다.

우리 집 근처에 소민 엄마가 산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며 능숙하지 못한 운전도 잘하는 그녀에게 얼마 전 건강검진 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대전에 갑상샘 잘 보는 외과를 안다며 당장 가보자 했다. 머뭇거리는 나를 끌다시피 하는 그녀가 오늘은 앞산보다도 높고 커 보였다.

병원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료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놓였다. 나는 건강검진 때 받았던 소견서가 보물 지도라도 되듯 손에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소민 엄마 손을 꼭 쥐었다. 소견소를 본 의사 선생님은 감기 환자 보듯 대수롭지 않게 초음파를 찍어보자 했다. 간호사가 소민 엄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하고 나만 조금은 어두운 곳으로 데리고 갔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 목을 젖혔다. 모니터를 보며 물혹이 왼쪽에 4개 오른쪽으로도 1개가 있으니 오늘은 그중 왼쪽 깊이 있는 물혹 2개를 조직 검사한다 하였다. 검사 후 진료실에서 사시나무 떨 듯 앉아있었나? 의사 선생님은 맘 편히 가지라며 영화배우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결과 기다리는 이틀은 십 년 가듯 더디게 갔다. 오후 4시쯤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90%는 악성이라며 보호자와 함께 내원할 것을 당부했다.

며칠 후 마음을 다잡고 남편과 병원으로 갔다. 감상샘 암은 완치율이 높고 수술만 잘하면 죽을 일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대형병원도 수술을 잘하니 굳이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될 듯 하다며 두 곳을 추천했다. 나는 수술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다란 암보다 갑상샘은 전이가 늦어 착한 암이지 수술이 늦어 다른 데로 전이되면 다른 암과 같이 골치 아프다 하였다.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우리 가족 보금자리 집안을 둘러봤다. 눈물이 났다. 남들에게는 작고 허술할지라도 내게는 뼈아프게 소중한 집. 현관문을 닫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만큼이었다.

정황상 수술은 꼭 해야 한다고 했기에 만약을 대비해 집안을 정리했다. 아들 옷장을 열었다. 속옷과 양말이 얼마나 있나 봤다. 낡고 해진 것들이다. 싱크대를 열었다. 색 바랜 반찬통과 기름에 찌든 프라이팬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과감하게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보호자인 남편과 1차 기관 외과에서 추천한 곳 중 한 곳인 대학병원으로 담당의 교수님을 찾아갔다. 우리는 예약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럴 수가!’ 병원으로 오던 중 차창 밖 인도에서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여기는 우글우글했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많은 사람이 그것도 암 병동에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갔다. 타 병원에서 조직 검사한 것을 본 교수님은 암이 아닐 확률 1%라며 수술 날을 잡았다. 나는 병원 일정에 맞출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왔다.

마음이 울컥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검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앞일은 알 수 없는 거 아니겠는가. 장지갑을 들고 유명업체 속옷가게가 있는 건물로 갔다. 아들 속옷을 사고 수건도 사고 양말도 사고 내가 없어도 얼마간 필요한 물건을 사 서랍을 채우고 싱크대를 채웠다.

수술하기 위해 입원하는 오늘은 딸이 보호자다. 입원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오니 6인실이었다. 모두가 죽을 만큼 아픈가 보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겁이 덜컥 났다. 수술 후 내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간호사가 저녁밥 먹고 난 후부터는 금식이니 물도 마시면 안 된다고 나에게 다짐. 다짐을 받는다. 환자복을 입으니 잠이 쏟아졌다. 주위 환경이 잠을 잘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잠을 깊이 잤다.

아침이다. 간호사가 수술이 첫 번째로 조정됐다며 10분 후 수술실로 간다고 했다. 원래 일정은 11시였기에 편히 자라고 엊저녁 딸을 집으로 보냈다. 그래서 마음 불안한 지금은 혼자였다. 눈물 가득한 눈을 껌벅이며 남편 휴대전화 문자로 ‘나 수술실로 간다.’를 전송하고 보호자가 아닌 간호사가 미는 수술대에 누워 수술실로 갔다.

눈을 뜨니 병실이다. 딸, 아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통증이 심했지만 괜찮다는 신호로 모두 보라고 미소를 크게 지었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되어 목소리도 생각보다 맑고 간호사와 가족의 지극한 병간호로 나흘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내가 환자이긴 한가보다. 시댁식구, 친정식구가 관심과 정성을 들인다. 한 번도 받지 못한 호사였다. 목에 난 깊은 상처만 아니면 누구도 내가 아팠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회복이 빨랐다. 역시 나는 나였다.

열흘 후 예약된 외래진료라 병원을 갔다. 교수님도 수술 부위를 보더니 3개월만 지나면 흉터도 없어질 것이고 수술 후 먹는 약도 없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운동을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사흘이 지났나? 몸이 이상했다. 팔다리의 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심했다. 내가 운동을 게을리 해서 그런가 하고 힘껏 걷기 운동을 했다. 그래도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수술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나는가 싶어 참고 참았다. 시간이 갈수록 음식도 넣을 수 없을 만큼 입안 통증이 심했고 머릿속은 물론 뱃살까지 젓가락으로 휘젓듯 저렸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다.

소민엄마에게 전화했다. 내 목소리를 듣더니 심상치 않다 느꼈는지 바람처럼 우리 집으로 왔다. 그녀는 정신 나간 듯한 나를 보며 도대체 왜 이러냐며 처방 약을 보여 달라 하였다. 먹는 약이 없다고 하자 이상하다며 병원에 확인할 것을 권했다. 그렇지만 난 의사 선생님을 부처님 믿듯 믿었기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아들이 휴무라며 집에 왔다. 온몸이 마비된 나를 모고 식겁을 한다. 병원으로 전화하니 간호사도 놀란 듯 큰소리로 오늘 교수님 진료 날이니 빨리 오라고 했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으로 온 남편이 운전하고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팔다리를 주무르는 아들을 보니 눈물이 흘렀다. 눈물 닿는 살갗이 호미로 골을 파듯 찢어지게 아파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병원에도착하여 진료실로 가니 교수님은 나의 상태를 확인과 동시 PC기록표를 본다. 지난번 외래진료 받고 왜 약을 안 받아갔냐며 갑상샘을 전 절제해서 약을 꼭 먹어야 하는데, 하며 우리를 주사실로 보냈다. 투명한 액체를 30분 맞으니 저리어 비비 말리던 증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기하여 간호사에게 주사액이 뭐냐 물으니 칼슘이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20일 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은 몸에 칼슘이 바닥나서 나타난 증상이었다.

그 후 몇 번의 영양 주사를 맞고 처방 약을 먹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입맛도, 기초체력도 생겨 일상 생활하는데 별 지장 없게 되었다.

인체의 신비. 갑상샘은 내분기관으로 신체건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호르몬과 칼시토닌을 만들어 분비하고 체온유지와 신체 대사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칼시토닌은 뼈와 콩팥에 작용하여 혈중 칼슘 수치를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몸속 장기 하나하나 제 역할 않는 것이 없겠지만, 갑상샘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몰랐다.

나는 갑상샘을 전 절제했기에 이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 그래도 좋다. 지금은 전처럼 죽어도 좋을 만큼의 통증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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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시골 농부로 살아가는 아줌마 이야기

송 미 경(51)씨

정유년 새해가 벌써 석 달이나 지나간다. 들에는 새 농사를 준비하는 일손들이 분주해졌고 양지바른 언덕에는 새순 쑥이 깔리고 냉이는 이미 크게 자라서 된장국 냄새가 풀풀 나는 듯하다. 매실나무 꽃 봉우리가 터질 듯 부풀어 있고 포도나무 묵은 가지가 잘려 나가고 풍요의 열매를 기대하는 농부들의 화사한 얼굴에서 새 소망을 읽는다. 우리도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며 올 한해가 더욱 보람되고 즐거운 추억이 만들어 질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삼면이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조용한 골짜기에서 초보 농부로서 살아가는 것이 늘 마음 설렘이 있으며 행복하게 느끼곤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입버릇처럼 아늑한 농촌에 자리 잡고 그림 같은 세월을 만들어 가기를 소망했다. 삶의 가장 힘들었던 고비에서 만학으로 대학을 나오고 석사과정에도 입문하여 공부하는 일에 몰입하면서 참 보람의 삶은 무엇인지 고뇌하고 몸부림쳤으나 이제 농촌에 자리 잡고 귀농인의 걸음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시골 마을에 정착하면서 밭고랑을 누비며 호미로 펜을 삼아 나의 농촌 생활사를 써나가며 무엇보다도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심정이다. 때론 밭둑에 걸터앉아 지친 몸을 쉬노라면 그동안 숨겨졌던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올려 지면서 내 마음에 생기를 불어주니 다시한번 힘 있게 김매기에 질주한다.

이렇게 사노라면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은 잃었던 감성을 자극하며, 철따라 열심히 사시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그 안에서 새 소망을 키워간다. 때로는 계절에 따른 농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옆집 농사를 흘겨보며 흉내를 내곤 하였다. 스쳐 지나쳤던 시골의 풍경도 나의 현실의 생활로 다가와 부대끼면서 돌파하고 적응하는 소재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농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몸 베 바지 입고 장화신고 밀짚모자 눌러 쓰고 영낙 없는 시골 아줌마 농부이지만 내 마음엔 제2의 삶을 힘차게 열어가는 축복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렇게 농사꾼으로 살다보면 토지소산이 하도 고마워 우리는 각양 열매와 채소 등을 이웃 도회의 어르신들과 나누면서 행복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옥천의 노인 어르신들과 또 다른 이웃들과 만남의 방식을 찾아보고자 한다.

아담한 우리 농장에는 뽕나무가 있어 짙은 청색의 오디가 달리고 냉이, 쑥, 머우 등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수 있는 자연산 건강식품이 지천이다. 또 보리수나무가 있어서 새콤달콤한 맛을 뽐내는 빨간 열매가 얼마나 많이 달리는지 정말 탐스러우면서도 간간히 무더위에 타오르는 목마름을 해갈 시켜주기도 하는 복덩어리이다. 이 열매를 보고 이보다 더 좋은 천연 음료는 없다 하면서 한 웅큼 입에다 넣곤 하면서 즐거워하는 남편은 어찌 그리 천진한 어린 아이 같이 보이면서도 나의 귀농 훈련을 응원해 주는 커다란 울타리요 기둥이다.

어느 날 남편은 돌미나리를 키워보자고 하면서 웅덩이를 만들자고 삽자루를 내게도 건네주었다. 땅을 파서 그 흙으로 둑을 만들고 물을 담아야 하는 데 아무리 삽질하고 파고 또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더니 마침내 웅덩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니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 땀방울이 빗방울이 되도록 한바탕 씨름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속에서 나눔의 계획을 실천했다. 미나리를 심어 가꾸고 수확하여 나눔의 봉지를 만들어 홀로 사시는 할머니들께 드릴 때 어르신들이 기뻐 반기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 농장에는 가끔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누구는 삶에 지쳐있어 마음을 달래고 피곤한 몸이 건강하기를 소원하는 이들도 보게 된다. 농촌의 환경이 이런 경우에 정말 저절로 힐링이 되어 마음이 유쾌하게 되는 원기 회복의 좋은 피난처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농장 주변을 걷기도하고 한없이 쏟아 내는 지쳐있는 삶의 얘기를 들어주고 상한 마음을 다독여 주다 보면 어느새 생기가 돌아오고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농촌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잃어버렸던 식욕도 살아나는 데 이럴 땐 갑 싼 돼지껍데기 요리가 제격이다. 돼지껍데기는 근사한 요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때마다 나는 주방에서 손놀림이 바쁘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함께 하는 식사가 어찌나 맛있던지. 아 아름다운 농촌이여. 상한 마음도 치유하는 자연이여….

또 올해도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무슨 채소를 심고, 어떤 과수를 돌봐야하는 지 달콤한 꿈을 꾼다. 아름다운 옥천에서 하늘이 베풀어 주는 은혜가운데 부지런히 살며 또한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려한다.

이렇게 다짐해 보지만 봄이 짙어지면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가 너무 얄밉고 무서워 어찌 견뎌내려나 입을 쭉 내민 채 오늘도 호미를 들고 밭고랑에 나간다. 내 남자, 나를 향하여 엄지척, “당신이 최고야”하는 바람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 밭고랑을 열심히 긁고 토지에서 행복을 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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