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짜꿍동요제의 ‘정순철’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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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짜꿍동요제의 ‘정순철’ 탄생하다
  • 유정아기자
  • 승인 2017.04.13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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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학다큐소설⑥
고은광순의 ‘해월의 딸, 용담할매(청산편)’

점심을 먹으려고 밥상에 앉은 윤이 우욱 구역질을 했다. 얼른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뛰쳐나가 누렇고 끈적한 액체를 흙바닥에 내뱉었다. 보름 전에 있어야 할 달거리가 없어 혹시 하던 터였다. 정주현의 집으로 어거지로 끌려온 지 6년째. 정주현에게 마음의 문을 열자마자 아기가 생긴 것이다.

“언니 아기 가졌나 봐요!” 뒤따라 나온 시누이 아현이 소리쳤다.

윤은 아버지가 남긴 법설 중 내수도문 중 포태에 관한 글을 새기며 열 달 동안 공을 들여 가족의 기대와 축복 속에 신축년(1901) 9월 아들을 낳았다. 시아버지가 항렬에 따른 순(淳)에 철(哲)을 붙여 순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기는 작았지만 야무졌다. 한 달이 지나자 옹알이를 시작했다. 세상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 잠을 자다가 방긋 미소를 짓기도 했다. 도대체 넌 어느 별에 있다가 내게로 온 거니? 윤은 아기가 너무 예뻐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싶었다.

시누이 아현에게도 혼삿말이 오고 가더니 혼인 날짜가 잡혔다. 집안일을 하랴, 아기를 돌보랴, 시누이 혼사를 준비하랴 정신이 없었다. 혼삿날을 며칠 앞두고 안팎으로 마음이 분주하던 시어머니 윤 씨가 밥상에 앉았는데 숟가락을 들 힘이 없다고 했다. 입에 떠 넣어준 국물이 한쪽으로 흘러나왔다. 혼사를 늦출 수가 없는 형편인데 윤 씨가 자리에 누우니 아현이 이웃에 사는 친구 유이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니 혼수라고 많이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신랑각시가 덮고 잘 이부자리와 시부모 이부자리며 일가친척에 돌릴 버선이며 바느질거리가 많았다. 경황없이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윤 씨의 병세가 악화되더니 윤의 기도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유이수는 친구의 혼수 준비를 돕다가 장례까지 돕느라 달포 이상을 계속 집에 눌러있게 되었다. 윤은 시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산소에 가서 시어머니의 물건들을 태우고 저녁 늦게 다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얼핏 순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급히 방으로 뛰어든 윤은 방에서 포옹하고 있던 두 남녀를 보았다.

주현이 급히 유이수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어… 우리 집안 일 때문에 계속 수고를 해 주고 있어서… 내가 고맙다고….”

유이수는 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순철은 고이 잠자고 있었다. 윤은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윤의 가슴으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너에게 마음의 문을 연 지 1년 반도 되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어머니 상 중이 아니냐.’ 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분노와 달리 심장은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어갔다. 냉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구름 많은 밤하늘 위에 가까스로 빛나던 별빛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흐린 빛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네에서도 눈에 띄지 않던 유이수가 반년이 지난 가을 저녁 정주현의 손에 이끌려 대문을 들어섰다.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었고 다른 손으로는 봉긋 불러오는 배를 감싸고 있었다. 순철의 돌떡을 앉히려고 시루를 옮기던 윤이 시루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밖의 소란에 놀란 시아버지 정재홍이 나와서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옆에 있는 막대를 집어 들고는 아들의 손을 잡아 뒤꼍으로 끌고 갔다.

정재홍의 떨리는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정주현의 비명 몇 차례. 갑자기 뒤꼍에서 튀어나온 주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임자! 물! 물을!”

급히 방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러왔으니 정재홍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한 해에 그렇게 시누이가 집을 떠나고 두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 집에는 한 남자와 두 아내가 살게 되었다. 윤은 안방으로 옮기라는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안방마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유이수는 몇 달 뒤인 계유년(1903) 2월 아들 순익을 낳았다.

“당신은 8년 전 나를 이집에 강제로 밀어 넣었던 그때 그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순철이라고 하는 소중한 아기가 생겼다는 것, 오로지 그 사실만이 나를 숨 쉴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이곳에서 당신네들과 얽혀 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따로 나가 살터이니 작은 집을 하나 얻어주세요.”

윤과 순철은 살고 있던 교평에서 이웃해 있는 지전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나갔다. 정주현은 가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윤에게 다가왔으나 윤은 주현의 어떠한 몸짓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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