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하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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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하얀 별
  • 유성희 옥천지역인권센터복지국장
  • 승인 2017.06.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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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희 옥천지역인권센터복지국장

“산에 가요! 이번 달엔 꼭 가요...” 새해 계획을 짜며 한 달에 한 번 등산을 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핑계는 산에 오르는 일을 뒤로 밀리게 했다. 한껏 멋을 내느라 고운 연둣빛 치마를 꺼내어 입은 물오른 나무들이 손짓하는 4월에도 나서지 못했다. 색색이 화려한 옷을 입고 춤추는 꽃들이 유혹하는 5월에도 집 주변에서 뱅뱅 돌았다. 그러다가 6월이 돼서야 발을 내디뎠다. 집에서 가까운 산에 가기로 했다. 옥천과 대전 경계에 있는 식장산으로 정했다. 가벼운 옷차림에 물을 챙기고 멋진 모자도 골라 썼다. 알이 큰 검은 선글래스를 끼고 거울을 보니 감춰진 나이가 만족스럽다. 차창 밖을 보니 다양한 푸른색의 산들은 푸른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산은 언제든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납작 엎드리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나무들은 정렬하여 서서 일제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열 받는 사령관이 된 듯 약간 으쓱하고 흥분도 되었다. 시원한 바람이 살살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져주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도 활짝 열렸다. 세미한 바람 소리가 귀에 닿고 싱그러운 숲의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경쾌한 음악의 타악기 소리 같다. 발자국 소리가 달라지는 듯 하여 발밑을 보니 무수히 많은 흰 꽃들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무슨 꽃일까?’ 꽃 하나를 집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먼저 오른 등산객들에게 무수히 짓밟혔고 우리 또한 이 꽃들을 밟아야만 산에 오를 수 있다. 밟고 지나기에는 작고 예쁜 꽃이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예쁜 꽃이었다. “별 같지 않아? 별 같다 그지? ” 남편은 내게 꽃을 내밀며 말했다. “별 이라구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근데 진짜 이름이 뭘까요?” “별꽃이야. 별꽃” 남편은 스스로 지은 이름에 만족하여 장난스레 웃었다.

하얀 별꽃.

숲속을 자세히 보니 골짜기에 하얀 그 수 많은 꽃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뒤덮여 있었다. 문득 6.25 때 아무도 모르게 떨어졌을 안타까운 청년들의 영령이 생각났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골짜기에서 하얗게 떨어진 꽃들을 보며 왜 그들이 생각이 나는 걸까?

우리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이시다.

그때 맞은 총알 파편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그 흔적을 안고 60여 년을 살아오셨다. 내가 자랄 때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전쟁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곤 하셨다.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실감 나는 전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섭기도 했지만 흥미롭게 들었던 것 같다. 가끔 술에 취한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토막토막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셨다.

“목이 말라죽겠는 거야. 냇물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마셨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글쎄… 냇물 위쪽에 시체들이 쌓여 있었어.”

“그 고지는 중요한 고지였어. 우리가 점령하여 깃발을 꽂으면 다음 날은 적군이 빼앗았지.

그리고 그다음 날은 우리가 이기고… 50명이 넘은 분대원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5~6명이야. 흑흑 ...”

“내 다리에 총을 맞았어. 다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걸을 수가 없는 거야. 이제 죽었구나 했지. 그런데 날 업고 내려온 친구가 있었어. 생명의 은인이지…”

이야기를 하시다 꺼억꺼억 어린 자녀들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셨던 아버지.

우리 곁에 계신 아버지는 항상 주인공이었고 끝까지 살아남으셔서 훈장을 달으셨지만,

그때 산에 두고 온 부하들이 항상 눈에 밟혀 아파하셨다. 그렇게 자녀들 앞에서라도 이야기를 해야 만이 가슴에 맺힌 아픔과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겠다는 것을 커서야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이 산골짜기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하얀 꽃들을 보며 홀로 외롭게 죽어간 장병들이 떠오른 것이다. ‘피를 흘리며 홀로 죽어가며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엄마 엄마 부르다가 눈을 감았겠지. ’

여기 피다가 떨어진 이 꽃들처럼 이름 모를 수 많은 젊은이들 산야에 누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희생을 자박자박 밟으며 편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꽃다운 젊은이들이 꿈을 피우기도 전에 땅에 떨어뜨려 짓밟아 버린 전쟁은 이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남편의 말처럼 별, 별꽃.

그들의 가슴에 별을 달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 산에 두고 온 분대원들과 그 날에 쓰러진 모든 영령들이 별꽃이 된 것 같다. 다시 숲을 바라보니 그들은 별을 달고 하늘에서 하얗게 웃으며 또 떨어진다.

붉은 유월에 떨어지는 하얀 별.

하얀 별을 가슴에 안고 타박타박 산을 오르다가 온통 하얀 별을 달은 나무를 또 만났다. 그 나무에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이름표를 보니 ‘때죽나무’다.

때죽나무의 꽃이 떼죽음을 당했는데도 우린 무심코 밟고 지나가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유월에 떨어지는 꽃은 고이고이 가슴에 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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