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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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하는 자세
  • 임주묵 미국재무위험 관리사
  • 승인 2017.06.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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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묵 미국재무위험 관리사

눈 깜짝할 사이에 40대 후반에 안착해서 이제 곧 50대에 들어선다고 생각하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다가올 50대라는 미지의 영역 탐험이라는 불확실성과 두려움 속에서도 지난 40대처럼 세월을 마냥 물 흐르듯이 흘려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다가올 50대라는 신세계를 맞기 전에 앞으로 어떤 내가 될까라고 생각해본다.

솔직히 예전에 20대에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세월이라는 거대한 풍랑 앞에 거대한 바위도 풍화되어 한줌의 모래알로 산산이 부서지듯, 노쇠화라는 이 거대한 파도는 제 몸속에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생기마저도 휩쓸어 가더니 서서히 화석화시키는 느낌이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 비틀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밑동이 잘린 채로 더 이상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없는 저희 집 화단의 감나무처럼….

나는 가끔 그 고목 나무 앞에 서서 간절히 기도하곤 한다.

하느님! 저 죽은 고목 나무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꽃을 피우게 하소서… 라고.

그리고 소원해본다.

지금 처해있는 현실 상황과는 다른 모습으로 지금 오감으로 체감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태가 미래에 펼쳐지기를….

누구나 그렇듯이 한 때는 삶이 희망으로 가득 찼고 그 나날들은 끝없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도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있었다. 그때는 젊음이라는 혈기왕성한 패기로 어떠한 험난한 폭풍우도 헤쳐 나갈 무모함도 있었지만 이젠 어떠한 저항도 무력화시키는 이 ‘노쇠화’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 마치 놀이공원에서 많은 인파에 떠밀리어 부모를 잃어버린 채로 어찌할 바 몰라 울고 있는 갓난아이처럼 한없이 나약해 빠진 초라한 내 모습을 보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같이 밀려온다.

한동안 먼 허공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육체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며 불멸한다”라는 플라톤의 말이 떠오른다. 만약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저 죽은 고목에서도 정령은 존재하며 보잘것없는 허물어져 가는 육체 속에도 불멸성을 띤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육체(빈껍데기, 물질)를 핑계로 좌절감과 상실감이라는 술독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기보다는 내 영혼의 꽃(영원, 진리)을 찾기 위해 머나먼 항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떻게?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사물)을 찾으려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안목)을 가지려는 여행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움은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말 아름다움이 사물(물질)에 있다면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깊고 신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바라보는 대상(사물)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며 오로지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통찰력)에 따라 그 대상에 불멸의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를 통해 ‘네 장미꽃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라며 ‘관계’ 속에서 영원한 진리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이런 고귀한 영혼(정신, 시각, 안목, 통찰)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단순히 관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사물들과 교감하고 공감하며, 영원한 진리에 대한 욕망을 실현시켜줄 역량을 키우고 무수한 노력이 동반된 실천과 함께 마치 장인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수만 번의 담금질을 통해서 비로소 영혼이 담긴 명검이 만들어지듯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게으른 영혼은 일상의 공허한 습관의 타성에 젖어 스스로 헤엄쳐 나올 동인을 스스로 내부에서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진리(공감)를 찾아가는데 있어 능동적으로 창조적인 행위를 추진할만한 역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반드시 외부에서의 자극이 필요하다. 이것은 각자 삶의 방식에 따라 다양하니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우리는 인간 세상사를 비웃는 듯이 무심하게 흐르는 저 도도한 강물의 흐름 같은 세월 앞에 이제 막 갓 태어난 애기에게 부모의 사랑을 빼앗겨버린 어린아이처럼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세월이란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무차별하며 또한 공정하다. 단지 하나의 세계(대상)임에도 이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 의해 완전히 다른 세계(대상)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혜안)를 깨닫고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그 속에서도 영원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마치 수백 년 질곡의 세월이라는 모진 풍파를 담담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이고도 늘 푸르름으로 간직한 채 선악을 초월한 사랑이 뿌리 깊숙이까지 내리어 무엇이든 포용할 것 같은 노송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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