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논단(論壇)
정지용, ‘프랑소와 카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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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논단(論壇)
정지용, ‘프랑소와 카페’의 기억'
  • 김묘순 수필가 시인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 승인 2017.08.03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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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에게 물렸는지, 풀독이 올랐는지 양손이 가렵더니 이내 부어오른다.

정지용이 동지사대학에 입학한 지 83년 후였던 2006년 9월 4일. 정지용의 흔적을 찾아 동지사대학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정지용 시비 주변은 풀이 우거져 있었고 그 풀숲에는 모기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날도 쇠파리만 한 모기에게 물렸었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던지. 물파스를 바른 후 모기에게 물린 가려움증을 주저앉혔다.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교정인 국제교류센터 옆에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2005년에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을 적어 시비를 세웠다.

필자는 󰡔옥천문화󰡕 편집을 위하여 정지용의 시비 건립 후 시비에 대한 일본 현지인들의 관심을 알아보고, 정지용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서 동지사 대학으로 향하였다.

동지사대학 교우회 박 회장과 윤동주 시인 추모회 사무국장이 안내를 해주셨다. 그들의 안내로 윤동주 시비와 나란히 세워진 정지용의 시비 앞에 섰다.

10대에 경성유학 시절을 보낸 정지용. 그는 20대에 교토 유학 시절을 보냈다. 시비 「압천」에는 정지용의 어린 고향 옥천과 큰 고향 대한민국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였다. 그곳에서 정지용이 그리워하였을 그의 고향을 생각하였다.

그는 경성이라는 낯선 곳과 일본이라는 적지를 만나면서, 또다시 그곳을 떠나면서 비로소 문학적 감성이 견고해졌으리라.

동지사대학 국제교류센터 과장 渡辺孝義, 자료조사과 사무국장 小技弘和 九貴弘一, 동지사대학 교우회 박 회장, 윤동주시인 추모회 사무국장과 통역을 해준 연세대학교에서 유학을 온 심리학과 학생과 함께 정지용의 학적부와 기숙사 기록지 등의 자료를 확인하였다.

정지용이 유학 시절에 수업을 받았던 건물들과 그의 친구 김말봉, 후배 김환태 등과 함께 걸었을 교정은 군데군데 1920년대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필자는 마치 정지용과 함께 동지사대학 교정을 걷는 듯하였다.

일행과 함께 정지용의 산문 「압천 상류 상·하」의 공간적 배경이었던 압천(가모가와)에 가서 정지용과 윤동주의 유학 시절과 일본인들의 그들에 대한 생각을 전해 들었다.

윤동주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작품 발굴에 대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고 윤동주 시인 추모회 사무국장은 전하였다.

우리 일행은 통역 학생의 안내를 받으며 압천을 따라 걸었다. 정지용과 윤동주가 걸었던 중압을 사복사복 걸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을 박 사무국장이 가리킨다. 후쿠오카와 윤동주의 하숙집, 윤동주와 정지용 그리고 그들의 조국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게 땅을 파고 주저앉고 만다. 눈물도 나지 않는 하늘이라는 민낯을 후려치고 싶어진다.

정지용의 시 「카페프란스」의 실제 모델이 되었음 직한 ‘카페프란스’라는 카페에 들렀다.

이곳은 정지용이 동지사대학 시절에 시상을 떠올리는 장소로 자주 이용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다. 압천을 바라보고 있는 2층 건물이지만 정문은 반대편에 있다. 이 주변에는 비슷한 건물들이 이마를 마주하고 있었다. 주로 1920~1930년대 지어진 건물이란다.

「카페프란스」의 모티브였다고도 하는 이 건물은 ‘프랑소와 카페’라는 간판을 2층 모서리에 달고 있었다. 1920년대 모습 그대로라고 일행은 전하였다.

이곳은 정지용이 다니던 그 당시 주인의 딸(할머니가 되어 있었다.)과 그 딸의 며느님이 운영하고 있었다. 의자와 탁자는 그 당시에 사용하던 것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고, 그 당시 사용했던 벽난로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벽난로에는 그을음이 세월의 더께만큼 앉아있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할머니와 며느님은 정지용의 유학 시절을 탐방 취재 중이라는 우리 일행의 설명에 깊은 호의를 보여 주었다. 이 호의 속에서 유학생 정지용의 외로움과 그리움, 방황, 꿈, 낯섦 등이 함께 묻어났다.

며느님은 “정지용을 모르겠다”며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정지용, 기억난다”며 “작은 키의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말한다고 통역은 전한다. 반가웠다. 정지용을 기억하는 할머니가 있다니.

그 후 7~8년의 세월이 갔다. 그리고 ‘프랑소와 카페’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주인은 바뀌었고 정지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지용과 함께하였을 벽난로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동지사대학 모기의 참을 수 없던 가려움증 마냥 필자의 가슴에는 애처롭고 서러운 그림자만 짙게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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