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빠는 없어” 아이들에게 나는 독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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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빠는 없어” 아이들에게 나는 독하게 말했다
  • 박현진기자
  • 승인 2017.09.28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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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남편 떠나보낸 뒤 홀로 세 아이 키우는 이주여성 알마 씨
“하루하루 힘겹지만, 아이들과 명절 함께 할 수 있는 것만도 축복”

지난해 옥천지역 결혼이주여성 몇 명이 생활고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족을 버린 채 떠나버려 세간에 회자된 바 있다. 그러나 남편을 떠나보내고도 7년째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웃음을 잃지 않는 이주여성도 있다. 필리핀 이주여성 알마씨를 찾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우리가 돌아봐야 할 이웃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편집자 주>

아이들이 삶의 전부라는 알마의 뒤로 막내가 그린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당신을 응원해요’라는 카피가 보인다.

오늘따라 남편이 늦는다. 몇 번을 현관 쪽을 바라보다가 끝내 점퍼를 걸치고 문밖으로 나섰다. 12월 칼바람이 매섭다. 옷깃을 여미는 손등이 금세 오그라든다.

남편이 늘 경운기를 끌고 다니던 언덕길 입구에 들어서니 눈발까지 날린다. 밑창 닳은 플라스틱 슬리퍼는 빙판길에 주르륵 미끄러져 자꾸만 무릎을 찧게 한다.

“털신을 신고 나올걸”

저만큼 우리 경운기 뒤꽁무니가 보인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가까이 다가서니 경운기 모양새가 이상하다. 얼핏 남편의 옷자락이 보이는듯하다. 순간적으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

경운기 핸들 부분이 쓰러진 남편의 가슴을 육중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사 풀린 경운기 전면 운전대가 경사진 빙판길을 올라채지 못하고 헛돌다 거꾸로 미끄러지면서 남편을 덮친 것이다.

남편의 눈동자엔 이미 초점이 없었다. 남편은 처진 팔을 간신히 들어 올려 나를 불렀다. 뭔가 말은 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시간도 멈췄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꿈쩍 않는 경운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남편을 안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잡아 쥐고 119를 눌렀다. 구급차가 남편을 대전의 큰 병원으로 싣고 갔다.

2010년 12월 어느 오후, 남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필리핀에서 결혼, 옥천에서 행복을 꿈꾸다

 

알마(48·사진·군서면 은행리)는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자다. 필리핀에는 통일교 신자가 많다. 그만큼 교세가 확장돼 있다. 그곳에서 같은 통일교도였던 남편을 만나 2000년 국제합동결혼식을 통해 부부가 됐다. 그리고 1년 뒤 남편의 고향인 옥천에 둥지를 틀었다.

처음 시댁에 왔을 때는 시부모님이 살아계셨다. 외국인 며느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령의 시부모는 노골적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늘 거리를 뒀다. 그래서 처음 몇 년은 정말 힘들었다.

“말이라도 통해야 지지든 볶든 뭐라도 할 텐데, 그분들도 아주 답답하셨을 거예요”

알마는 2008년 두 분이 다 세상을 떠났을 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손주 셋을 애지중지 귀여워 해주고, 자신도 친부모님인 양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시부모님이 떠난 빈자리를 남편의 사랑으로 채워가며 알마는 옥천에서의 행복한 삶을 그려갔다.

거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세 아이의 상장. 알마는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이 상장들을 보며 웃는다.

▲ 세 아이는 “남편이 남겨준 선물이자 축복”

 

남편이 떠났을 때 아이들은 네 살, 여섯 살, 일곱 살이었다.

알마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아빠를 찾는 아이들을 입관 전 무덤 앞에 모아놓고 독하게 말했다. “이제 아빠는 여기 계셔. 집에 없어. 그러니까 아빠가 보고 싶으면 여기로 와서 저 모습을 기억하고 떠올려!”

어리기만 한 아이들에게 아빠의 죽음을 알려줄 방법이 달리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어요. 지금도 구급차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철렁, 지나가는 경운기만 봐도 가슴이 울컥해요”

그러나 그녀는 아이들이 있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초등학교 4학년, 6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됐다. “채소는 싫어, 고기 먹고 싶어”하며 아이들이 툭하면 반찬 타령을 한다면서도 알마는 ‘이뻐 죽겠다는 듯’ 살포시 웃는다. 그녀는 거실 한쪽 벽에 빼곡히 붙어있는 세 아이의 상장들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이들은 남편이 내게 남겨준 선물이며 축복이에요. 아이들이 없었다면 난 견뎌내지 못했을 거예요”

 

▲ 부모·형제 만나지 못하고 어느새 5년

 

옥천군에는 알마와 같은 다문화가정 427가구(2015년 말 기준)가 살고 있다. 군은 지난 2010년부터 다문화가족의 고국 방문을 지원하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모두 50가족 148명이 혜택을 받았다. 올해도 14가족 59명이 군의 항공료 지원을 받아 친정을 다녀왔다.

알마는 2012년 세 아이와 함께 필리핀에 다녀왔다. 벌써 5년이 지났다. 필리핀에 살고 계신 부모님도 보고 싶고 동생들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알마는 올해 모국방문 지원을 신청하지 않았다.

“항공권만 있다고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돈이 없어서’ 포기했단다.

알마의 한달 수입은 140만원 정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생계보조비 60만원과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알선한 일자리 월급 70~80만원이 전부다. 세 아이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은 지금만 생각하고 다음은 다음에 생각할래요. 남들은 얼마나 힘드냐고 안타까워하지만,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도 많잖아요. 헤어지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명절을 보낼 수 있는 것만도 커다란 축복입니다”

남편이 남긴 세평 때기 논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모두가 행복한 추석, 아픈 우리 이웃은 없는지 찬찬히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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