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파워토크 - 여성운동가 · 한의사 고은광순(60)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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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파워토크 - 여성운동가 · 한의사 고은광순(60)氏
  • 천성남기자
  • 승인 2016.03.0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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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한국의 뿌리 깊은 남존여비 사상의 굴레 속에서 남녀평등을 꿈꾸며 불의·부정에 대항하려는 마음을 키웠던 여성이 있다. 한 가정의 2남 4녀 중 막내딸이었던 그는 사회적 제도의 모순에 분노를 느끼며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여성운동가가 됐다. 한국 여성운동의 기수이며 한의사인 고은광순(60 · 옥천 청산면 솔빛한의원)씨는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해 “평화를 만들고 무기회사를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최근 국어교사, 시민운동가, 명상지도사 등 11인의 ‘동학언니들’과 함께 여성동학다큐소설인 ‘동학세상을 살리라(전13권)’를 펴낸 실천운동가의 삶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 평화 · 사랑 외치며 새로운 세계 꿈꾼다

여성운동가이자 한의사인 고은광순(60)氏

 

 

 

 

 

 

 

여성운동가이자 한의사인 고은광순(60)氏

■ 여성주의 · 동학 · 명상을 토대로 한 평화운동

그의 나이 60세. 짧은 머리에 짧은 흰 치마를 걸친 정장슈트의 활동적인 옷매무새가 여간 범상치 않다.

가장 자신 있게 지금껏 그가 추구해온 것은 여성주의, 동학, 평화운동, 명상 등을 고루 접목시킨 ‘귀한 우리,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명제의 실천 덕목을 잘 실현하기 위하여 선현인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항거했던 바로 지난 3월 1일, 청산면사무소 인근에서 동학을 흠모하는 너 댓 명의 동학언니들과 지역민이 함께 또다시 피켓을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무기 생산을 중단하라’, ‘전쟁은 그만! 양쪽 군인 모두 어느 어머니의 자식이다’ 라며 진정한 평화를 위한 외침을 외쳤다. 그리고 이것이 실현될 때까지 그는 100만 명 1인 등불국민운동을 펼쳐갈 것임을 천명했다.

■ 2012년 옥천 청산면으로 이주해 둥지 틀어

명상공부 하던 친구들과 공동체를 만들 생각으로 옥천으로 이주한 것이 2012년. 바로 청산면 삼방리 저수지 인근이다, “1894년 동학의 총본부가 여기 청산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죠.

내가 청산에 집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도종환 시인이 책을 한권 보내줬는데 그게 ‘정순철 평전’이었어요. ‘엄마 앞에서 짝짜꿍’ 동요를 만든 작곡가예요. 근데 평전에는 동학얘기만 나왔어요. 알고 보니 정순철이 청산 태생인데, 해월 최시형(동학의 2대 교주)의 외손주였어요.”

■ 호주제폐지 · 반전 평화운동 등 펼쳐

이곳에서 아담한 솔빛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환자들이 이곳을 찾기 전에는 꼭 전화약속을 해야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다니 그 분주함이 가히 놀랍다. 사람을 고치는 일 외에도 평화를 사랑하는 일에 그렇게 열정을 가질 수 있다니 오지랖도 충분히 넓다.

이화여대 시절부터 지금껏 그가 주창해온 일은 호주제폐지, 내 제사 거부하기, 안티미스코리아 운동 등 여성주의 운동이었고, 한의사가 되고 부터는 줄곧 종교법인의 재정 투명화, 무자격자의 한약 조제 금지, 최근의 반전평화 시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인 활동을 해왔다.

‘무기 생산을 중단하라’, ‘전쟁은 그만! 양쪽 군인 모두 어느 어머니의 자식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구호를 찍어 조끼처럼 몸에 두르고, 시위하는 장면.

 

 

 

 

 

 

 

 

 

 

 

         ■ 중·고교 생물학 시간에 성차별 근원 알아

고은광순은 1955년 아버지 고주상과 어머니 은예동의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197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두번 구속되고 두번 제적되는 고초를 겪은 뒤 1984년 다시 입시를 치르고 대전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한의사가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 배운 생물학 시간에 남녀차별이 생긴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됐어요. 근본적인 차별에서 시작된 여성 성적차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바로잡아야 할 악습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어 왔어요.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던 본질적인 이유가 된 거지요.”

■ 별명은 ‘영감’, 싸울 때는 ‘찐득이’로 불려
“저요? 어렸을 때 별명은 ‘영감’이었어요. 언니에게 물려받은 옷과 가방, 교복 등을 입어도 결코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던 아이. 그런 아이였어요. 조용하고 언제나 책을 좋아했으며 유달리 존재감이 하나도 없었던 아이, 그러나 싸울 때는 누구보다 찐득이 같았고 어떤 일이든지 얼렁뚱땅 끝내는 법이 없던 철두철미한 아이였어요.”

■ 2005년 여성단체연합 구성 운동 펼쳐
지난 1999년, 어렸을 때부터 가족관계에서부터 남녀 차별에 대한 가슴속 분노를 가졌던 것이 도화선이었는지 그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을 만들어 부조리한 사회제도 모순에 대해 대항하기 시작했다.

“1999년 말과 2001년 쯤 미국에 갔다 왔어요. 그곳에서 국내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 모임을 만들어 성차별이 되는 호주제 폐지를 외치기 시작했지요. 2005년쯤에는 여성단체연합을 구성해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지요”

■ 예전엔 아들 낳는 처방전 손님 많아
“예전엔 아들 낳는 처방을 받으러오는 부인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사회적 현상으로 비쳐졌어요. 10대 독자다, 5대 독자다 하면서 말이지요. 귀중한 생명으로 딸이나 아들이나 소중한 생명인데 당시는 왜 그리 차별이 심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요.

어찌보면 김, 이, 박 3성이 45%라는 건 족보가 대부분 가짜고, 일제 때 양반 흉내 놀이를 시작했단 건데, 그런 거짓말, 위선, 허세 그런 걸 미풍양속인 줄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전엔 동학이 있었고, 호주제 폐지의 이면에는 동학이 있었어요.”

 

 

 

 

 

 

 

■ 무기 없는 세상과 평화사랑 운동 강조

그가 강조하는 것은 “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고 평화롭게 살자”는 내용이다. 감사와 사랑, 축복 등 명상지식을 습득하면 저절로 평화와 사랑이 깃든다는 것이다.

가족으로는 그를 이해해주는 남편과 아들 둘이 서울서 살고 있다. “요즘은 카톡도 있고 텔레그램도 있고 가족끼리 채팅을 하는데 같이 살 때보다 대화를 더 많이 해요. ‘오늘 꽃을 봤는데 너무 예뻤어!’ 그러곤 꽃 사진도 보내주죠. 주로 하는 게 가족 간에 격려하고 지지하는 말들이에요. 같이 살 때는 오히려 그런 얘기 잘 못하는데. 더 많은 얘길 하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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