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망산천 갈 나이에 춤추고 노래하고… 좋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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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망산천 갈 나이에 춤추고 노래하고… 좋다, 참 좋다”
  • 박현진기자
  • 승인 2017.11.09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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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매달리다 58세에 서예 시작, 수채화 까지 섭렵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여명… 새벽 작업 즐겨
5남매에 손자만 12명… 병석의 남편에게도 무한 감사
‘모태소녀’ 한국화가 오영숙(84)씨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거리를 질주하던 차량의 소음도, 옆집 담벼락 아래 둥지를 틀었을 들고양이의 애절한 울음소리도 멈춘 지 오래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건 깜깜한 어둠뿐이다. 조용히, 조. 용. 히. 가능한 작은 동작으로 램프를 켜고 벼루에 물을 담아 먹을 간다.
시작이다. 집중하자. 붓을 들어 적당한 농담(濃淡)의 먹을 적셔 화선지로 향한다.
“이런!” 낮에 있었던 지인과의 갈등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가? 붓에 힘이 들어갔다. 먹물에 휘둘린 화선지가 일그러진다.
잠시 정좌.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몸의 신경을 붓끝에 모아 한올 한올 난을 치고 매화를 그려간다.

보리작가 박영대 화백이 극찬한 매화도

성에 안 차 찢어버린 화선지처럼 사정없이 떨어져나간 감정의 파편들을 주워담기를 수십, 수백번. 그 끝에 마지막 체세포까지 끌어당겨 겨우 낙관을 찍고 나면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 주저앉고 만다.
깜깜할 때 시작한 그녀의 매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여명(黎明)이다.
그녀 역시 새벽빛이 주는 희열로 다시 일어선다. 또 시작할 수 있다. 여든넷의 한국화가 오영숙(84·옥천읍 문정리) 작가가 새벽 작업을 즐기는 이유다.

▲삶을 향한 애증을 붓 하나로 녹여내다.

그녀의 매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84년의 세월이 가볍고도 여린 붓끝에 실려 화선지에 앉았나 보다. 정갈하면서도 질서 있는 구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올곧은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한국화의 대가로 알려진 보리작가 박영대 화백은 그녀의 그림을 가리켜 “아주 전통적이고 교과서적인 그림”이라고 말한다. 보편적이고 진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되지도 않게 퓨전을 섞어버리는 오만을 질타하는 ‘정직한 고고함’이란다. “구도가 좋고 밀도도 있으며 정성과 집념이 느껴지는, 아주 잘 그린 그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한국화가 전공은 아니다.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살아오던 1991년, 그녀는 58세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을 뒤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피아노를 할까 생각하다 김선기 서예가를 찾아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난을 치는 매력에 빠져 사군자를 그렸고, 산수화를 하다 보니 눈이 어두워져 이제는 수채화까지 그리고 있다.
그녀는 서예로는 시작한 지 5년 만에 ‘대한민국서예대전 7년 연속 입선’이라는 화려한 경력이 있지만 그림 쪽으로는 별다른 수상 경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에 대한 대가의 그런 화평(畵評)은 여든넷 노 작가의 속에 꿈틀거리는 예술적인 ‘끼’를 짐작케 한다.

옥천읍 곳곳에 걸린 정지용 시비도 오 작가의 글씨를 서각한 것이다.

▲“춤바람에 살도 빠져” 엉덩이 흔드는 84세 소녀

오 작가는 어릴 적 소꿉동무와 백년해로를 약속했다. 남편 천범영(84)씨다. 그와는 옥천읍내 죽향초등학교 37회 동창이다.
천 씨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교편생활을 접고 서점(동아서적, 옥천읍 금구리)을 차렸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서점 일을 거들고 5남매를 키우면서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장남을 비롯해 5남매를 얻었고, 손주만도 12명이다.
이제는 손주들도 다 커서 ‘할 일’이 없어진 오 작가는 오로지 ‘붓’에 몰두하며 틈틈이 ‘체력 훈련’을 하고 있다.


복지관에 나가 스포츠댄스를 배우고, 보험관리공단에서 가르치는 장수춤도 추고,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도 한다.
지난 9월에는 보험관리공단의 체험수기 공모에 ‘100세 세대 춤꾼’이라는 제목의 수기를 응모해 1등도 ‘먹었다’고 했다.
그녀는 “북망산천에 누워있을 나이에 아픈 데 없이 이렇게 살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며 “춤 많이 추는 바람에 건강해지고 살도 많이 빠졌다”고 스스럼없이 엉덩이를 흔들어 보인다.
그녀는 여든넷의 ‘소녀’다.

 

▲남편 외조로 즐기는 ‘나만의 행진곡’

그녀는 붓말이를 들고 외출했다가 만난 이웃이 “어디가? 김밥 싸러 가?”하고 물으면 그냥 “응. 김밥 싸러 가”라고 대답한다. 붓을 넣는 ‘붓말이’가 김밥을 말 때 깔아놓는 대나무발과 똑같이 생긴 데서 오는 해프닝이다.
그녀는 굳이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거나 서예를 한다고 밝히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작업은 오롯이 그녀 자신을 위한 작업일 뿐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작업이 아니므로.
58세의 늦은 나이에 시작된 ‘그녀만의 행진’은 남편의 외조로 가능했다. 젊은 시절 자신을 내조했던 아내를 위해 남편은 매일 연습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시간을 배려해 주고 작업에 들어갈라치면 당연한 듯 자리를 비켜 줬다.
그런 남편이 지금은 건강이 안좋아 집에서 휴양 중이다.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힘들 거라는 상투적인 질문에 오 작가는 “남편은 지금 자기 한 몸 아픈 걸로 나는 물론, 자식, 손주까지 다 건강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 가족 중에 단 한 사람도 아픈 이가 없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며 “그래서 오히려 남편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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