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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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르 파티
  • 김현희
  • 승인 2017.11.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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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시인·역학자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애이다.
니체의 용어로서 일상의 삶을 무조건 긍정하는 태도가 운명애이다.
사주도 운명애이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운명애를 하는 사람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부품처럼 사용되다 버려진다.
‘나’라는 의식과 ‘내’ 몸은 사회적 상황에 맞춰 쓰이다가 버려진다. ‘나’는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부품으로 사용되다가 사라짐을 반복한다.


‘나’의 고정됨이 없다. 사회는 ‘내’가 안정할 적정 공간이 아니라 ‘내’가 타인과 마주치면서 버티고 견디고 변해야 하는 불안 공간이다.
더욱이 임기응변으로 살고 있는 사회적 약자라면 자기 삶의 불확실함을 힘들어할 게 아니라 긍정하고 사랑해야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내’ 운명이 괴롭고 힘들어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승리자이다.
‘내’ 운명을 타인과 비교하여 별 볼 일 없는 우울거리나 불평거리로 생각하면 살기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 고독하게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
관계나 조직 속에 있어도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존재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만의 숙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야 하고, 풀리지 않을 경우 시간이라는 자연의 힘을 빌려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흐름이 ‘내’ 운명의 주체자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 지진과 태풍과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재난을 당하는 것만 보아도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있기 전에 우주와 자연이 먼저 있었음을, 우주와 자연이 주재자임을 우리는 자연재해 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다. 명리학은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알려주는 학문이다.
동일성 유지가 없다.


내가 나무로 태어났어도 끝까지 똑같은 나무로 살아지는 게 아니다.
양기운의 나무인지 음기운의 나무인지, 봄 나무인지 여름 나무인지에 따라 다르고, 또 사주에 물이 있는지, 불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팔자에서는 ‘나’를 고집하면 생존할 수 없다. 나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보다 더 큰 자연의 흐름에 동화되거나 조절되어야 한다.
‘나’의 주인은 외부 자연이기에 인간의 삶이 불안하고, 그런 불안한 운명을 사랑하는 게 ‘아모르 파티’이다.
팔자는 자연의 변화무상함을 근거로 한다.
팔자는 대운 두 글자, 세운 두 글자, 월운 두 글자, 일진 두 글자가 만나 총 16글자가 그 날의 운수를 좌우한다.


그 열여섯 글자의 합, 형, 충, 파, 해가 그날의 운수를 좌우한다. 합은 사라지고, 형은 부딪치고, 충은 부서지고, 파는 깨지고, 해는 해롭다.
이런 과정이 매일 매 순간 일어나기에 팔자가 안정되어 있지 않고 불안하다.
부딪치고 깨지면서 운행되기에 인간의 하루가 쉽게 살아지는 것 같아도 쉽게 살아지는 게 아니다.
온갖 변화의 기운이 얽혀서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기에 사람은 자기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불안을 견디는 과정이다.
명리학은 그 불안을 합리화하는 기술 중 하나이다.
‘내 운명이 왜 이런가?’에 대해서 음양오행의 원리로 설명하면서 ‘내’ 운명이 ‘내’ 의지가 아니라 자연의 의지임을 인정하는 이론이다.


그래야 ‘내’ 운명의 어쩔 수 없음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사람은 힘듦을 버티는 근거가 있다면 오늘의 불행을 이겨내는 영혼이 있기에 ‘내’가 외롭고 힘든 팔자임을 사주에서 확인한 순간부터 자기를 사랑할 정신적 힘을 스스로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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