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편지
상태바
세밑 편지
  • 안효숙 수필가·소설가
  • 승인 2017.12.28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효숙 수필가·소설가

세밑의 추위를 견디지 못해 그만 괴로움을 몸에 달고 병실에 누웠습니다.
저물고 달이 기우는 밤 한켠에 이웃집의 개짓는 소리만이 어둠 속의 고요를 베어물 듯합니다.
실개천에 서 있는 가로등 아래로 조금씩 눈이 내립니다.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낮에 가게에 오신 손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허리가 반으로 굽은 할머니가 고운 미소를 지으며 가게로 들어오는데 어느 젊은 처자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주위가 환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신 할머니께 ‘좀 쉬었다 가세요.’ 하고는 차 한 잔 드리고 ‘허리가 많이 굽은 거 보니 젊은 시절 일을 많이 하셨나 봐요.’ 하니
ㅡ일해서 굽은 게 아녀유.
ㅡ그럼 사고 나셨어요?
ㅡ그게 아니고 이런 얘기해도 되나 몰러, 하고는 이야기를 풀어놓으십니다.


딸이 셋이고 오십 넘어 막내를 낳았는데 아들이지 뭐유. 지 누나들은 공부를 하지 말래도 기를 쓰고 하는데 막내는 공부를 안하더라고, 대학교는 보내야 하것는데 이 녀석이 시험 치룰생각도 안하고 강원도 어디라나 그짝으로 친구들하고 썰맨가 뭔가를 타러가고 학교를 안갔다지 뭐유. 하늘이 깜깜해지는 게 속이 하도 상해서 얘들 아버지하고 생전 첨 가보는 강원도로 막내놈을 찾아간 거 아녀유, 도착하고 보니 한밤중이지 뭐유.
맘이 급해서 고무신을 신고 갔는데 밤에 눈 쌓인 산을 올라가는데 깜깜해 뭐가 보여야지,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다시 걷는데 그러다 그만 오지게 얼음판에서 넘어져 정신을 잃었자녀.
그리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라구... 정신 채리고 보니께 우리 막둥이가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꼭 잡고 철철 우는데,
“엄마 깨어만 주세요.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내가 잘못했어요. 엄마, 엄마.”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가 다 변했더라고..
아이고, 이눔이 정신을 차렸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몸은 아파도 마음이 놓이더라구유.
그렇게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친구만 알고 공부는 안하던 애가 완전히 달라져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핵교에 가서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약국을 아주 크게 하고 있어요. 내 몸은 이렇게 되었지만 내가 그때 찾아가길 잘했지 뭐유. 우리 막둥이가 이렇게 잘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좋은지 몰러.


ㅡ그럼 그때 넘어져서 지금껏 허리를 못쓰시는 거예요?
ㅡ그려. 그래도 괜찮여. 내 몸 하나 망가져 막내가 잘돼서 여한이 없어.
그래도 몸이 불편하셔서 어떻게요. 하니 그래도 괜찮다니께…하는데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정말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 분간이 가지 않고 혼돈 상태였어요. 그래도 할머니께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항시 웃으며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행복해 보이셨어요.
그리고 할머니 막내아드님이 어머님 뵐 때마다 여간 죄스럽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혼자 해보았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비애와 상실을 넘어서 세상의 소란에도 흥분하거나 기울지 않고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그랬고 우리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어찌 한 해를 살았나요?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들, 그게 누구를 위한 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이 조금은 있어야 그게 합당한 삶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전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바닷가 저녁 일몰에 맞춰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를 찾는 동안 나는 혼자 첫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렌트한 차를 타고 친구들이 오기 전에 평소 혼자 걷고 싶었던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성산포 바닷가에 앉아 나와 이야기했고 박물관을 돌아보며 내가 전생에 무엇으로 태어났을까 하는 인연설로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관광객이 찾지 않는 한적한 동네의 찻집에 들어가 감귤바람 불어오는 제주 섬의 나른하고도 게으른 햇살과 끈적이지 않는 바람 아래서 크고 작은 어제와 내일의 일을 모두 놓아 버린 채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불성실한(?) 시간을 유쾌히 보냈습니다.
한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고마운 일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껏 지탱하고 있는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아서 말입니다.
한 해를 보내며 당신께 업드려 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올 한 해 사랑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