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판 옛 ‘맥계’마을이 섬마을 된 군북 ‘막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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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들판 옛 ‘맥계’마을이 섬마을 된 군북 ‘막지리’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08.30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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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가구 750명에서 14가구 19명만 남아
답양리~막지리간 2차선 도로 확장 시급
“귀향·귀농인 유치만이 마을 살 길” 절실

△막지리 연가
막지리가 고향이었던 천기석 시인은 그의 시 ‘막지리 연가’에서 “무구한 세월/굽이쳐 흐르는 금강 기슭에/ 금을 긋듯 물길을 내어/ 터전을 꾸린 투박한 삶// 갯벌의 청보리밭은/ 푸른 물결을 이뤄 넘실대고/ 하늘거리는 봄바람에 물이랑을 타면/ 종달새 하늘 높이 노래를 부르네//조무래기들 책보매고/ 도라꾸 지나간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버드나무 꺾어 호드기 만들어 불면/ 허리 굽혀 일하던 아줌마 이마엔/ 옥구슬이 주렁주렁 미끄럼을 타네// 사시사철 푸르던 아름드리 솔밭엔/ 솔향기 빗질한 바람이 말달리기를 하고/ 꽹과리 장단에 흥이 난 농부는/ 어깨춤이 절로 나고// 수호신처럼 동네를 지키던/ 세 그루 할아버지 나무는/ 팔 벌려 아이들을 안아/ 그네를 태워주네(중략)” 라고 수몰 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애잔하게 시로 되살려내고 있다.
수몰되기 전 막지리는 120가구에 주민 750여 명이 살던 동네였다. 강 쪽으로 느티나무 4그루가 서 있고 비온 뒤 강에는 물고기가 펄떡거렸다. 강물이 흐르고 자갈밭과 백사장 청보리밭이 어우러져 넘실거리던 마을이었다.

손호연(70) 이장은 막지리에서 방앗간 종갓집 큰아들이었다고 옛 마을의 사진을 보면서 설명해 주었다. 120가구 중 50~60가구가 손 씨들 집성촌이었다고 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옛 사진 속 마을은 그림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1979년 마을의 80%가 물에 잠기고 산중턱으로 이주해서 만들어진 마을이 지금의 막지리다.

△14가구 19명 주민
손 이장은 고향을 떠나 살다가 2015년 초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살면서 이장직을 맡아 고향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중이다. 막지리는 현재 14가구 19명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5가구는 방치된 상태인데 2가구는 귀농인이 들어와 살게 된 상태. 그 중 한 가구는 30년 이상 비어 있다가 대전에서 귀농하는 사람이 터를 닦고 내년에는 들어와 살게 될 거라고 했다.  3가구는 건물주와 땅주인이 달라 여전히 매매가 안 되는 상태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손 이장은 “마을 주민의 고령화로 인해 마을이 점점 쇠퇴해가는 것”이라며 “현재 막지리는 68세가 가장 어린 나이로 마을이 극히 고령화된 상태고 극소수만 남게 된 오지 중의 오지가 됐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민으로 들어와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집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안되고 실거주할 사람들에게 매매해서 마을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와 살아야 한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차선 도로확장과 출렁다리
손호연 이장은 “답양리에서 막지리로 오는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하다”며 “2차선으로 확장이 안 된 도로가 1,2Km인데 2차선 확장 공사를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막지리와 소정리 간 배를 타고 이동하면 5분이면 오고갈 거리다. 하지만 물이라도 빠진 상태에서 배를 타려면 마을 어르신들이 1,5km 뻘지대를 장화 신고 걸어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어르신들이 병원에라도 한번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불편이 따른다는 것. 이에 손 이장은 막지리 소정리 간 다리는 놓지 못해도 수면에 설치하는 출렁다리 정도는 설치해 줄 수 있는 문제라며 군의 적극적 검토를 요청했다.

△맥기 쉼터
막지리에 새롭게 단장한 집 한 채가 있다. ‘맥기 쉼터’가 바로 그곳이다. 넓은 잔디 마당과 깨끗하고 정갈한 방이 2개. 욕실도 최신식으로 완비되어 있다 물론 에어컨도 최신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출향인이나 마을주민,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쉼터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주민들의 뜻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 이곳은 수몰지역으로 많은 고향 사람들이 외지로 나가서 살아가고 있다. 선산이 이곳에 남아있는 많은 출향인들이 선산을 돌보기 위해 유독 많이 찾아온다. 그들이 벌초를 끝내고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마을에서 만든 장소다. 이 쉼터는 손 이장이 ‘행복마을 지원 사업’을 신청해 군으로부터 지원금 3천만 원을 받아 리모델링을 해 만든 것이다.

△귀향·귀촌인이 자립할 다세대주택 있었으면…
손호연 이장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시골집을 리모델링할 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고향에 정착 할수 있도록 다세대주택을 지어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자립할 수 있는 3년 간 거주 공간을 공급해 주고, 3년 후 땅을 매입에 지역에서 살 수 있도록 지원 사업이 필요하다. 이렇게 주민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 지역이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출향인들 중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마을로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마을에선 별장식으로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만 들어와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에 거주하면서 주민으로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주민들이 전하는 ‘막지리’
새마을 부녀회장 유경슌(68) 씨는 막지리에서 가장 어리다. 그녀는 군북면 지오리에서 막지리로 시집을 왔다. 1978년 28살에 결혼해서 그해부터 막지리에서 살기 시작한 지 41년이 됐다. “출향인과 만남의 날 행사를 25년째 해오면서 큰 보람을 느꼈는데, 주민들이 나이가 들어 이제 음식 장만하기가 힘들다”며 “올 부터는 이 행사를 못하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행사에 200여 출향인들이 모였다. 1세대 사후, 2·3세대는 고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고 전했다. 손옥자(77) 어르신은 고향이 막지리인데 타향인 과천에서 살다가 3년 전에 이곳으로 오게 됐다. 손 할머니는 “객지에 살면서 늘 고향이 그리웠다”며 “고향에 돌아와 화초도 심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특히 “행복마을에 선정돼 주민들과 함께 마을 꽃동산을 가꿔 눈만 뜨면 꽃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미소 지었다. 김점권(77) 어르신은 23세에 막지리로 시집 와서 54년을 살았는데 이곳은 공기도 인심도 다 좋다고 말했다. 심재인(84) 어르신은 고향이 철원 이북으로 막지리로 시집와 58년 째 살고 있다고 했다.

△‘막지리’ 아닌 ‘맥계’로 불러주오
마을이 강가에 위치해 포전(浦田)이 많아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 많은 보리밭을 보고 ‘맥계’라 했다. 대대로 전해진 본래 지명은 맥계이며, 일제 강점기 때 편리한대로 썼던 막지(莫只)라는 지명이 이제까지 쓰이고 있다. 주민들은 본래 지명을 되찾기를 원하고 있다.

△마을 역사
1739년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안내면 막지리라 하여 40호가 살았다. 1891년 기록에는 46호가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내면에서 군북면에 편입 오늘에 이른 것. 1980년 대청댐 수몰 전 120호에 인구 750여 명이 살았다.

△마을 이야기
예전에 장현채, 혹은 장현동이라고 불렸다는 장고개, 안내면 답양리 주민들과 이곳을 거쳐서 보은이나 청주로 가는 사람들이 걷는 길로는 장고개를 통해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막지리에는 마을과 연접한 두 개의 성터가 있다. 장고개에서 용호리로 넘어가는 산 주변 막지리 산성과 답양리와 경계에 있는 답양리 산성. 막지리와 답양리 산성은 신라 측에서 서금강을 건너오는 적을 경계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높은 산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어 경계의 목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고개 마을에는 손대창 효자문이 있다. 손대창 효자는 부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길도 나서지 않았던 효자에 대해 군내 유림들이 그의 효행을 조정에 상소, 1881년(고종18) 효자문을 세웠다.

△마을 명소
옛날에 막지리는 금강줄기를 따라 길게 형성된 백사장과 안내면 장계리까지 길게 나있던 모래밭은 4km가 넘었고, 마을 앞으로는 1만평 넓이 소나무 숲이 있었다. 금강에는 갖가지 물고기가 뛰어놀고 천막 하나만 가지고 가면 여름을 날 수 있었던 곳이 군북면 막지리다. 특히 석호리 백토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옛 선조들로부터 군북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을 이뤘던 경관이다. 석호리 옛 군북초교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막지리 뒷산에서 해가 떠오를 때면 금강에 비친 일출의 장관은 대청댐이 생기면서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
손 이장은 마을을 위한 계획으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 주민의 힘을 모아 ‘맥기 쉼터’가 만들어지고 이제는 실향민들이 보내온 사진과 시인, 화가, 사물놀이패 등 각종 자료들을 모아 사라져가는 마을 옛 이야기를 보전하고 전시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귀향·귀촌을 권장해 젊은이들이 마을로 찾아들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마을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하길 바라는 소망은 마을 전 주민의 한결같은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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