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바
  • 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 승인 2018.10.04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얼마 전에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벌써 몸이 움츠러든다. 세월 참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제는 곶감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충북에 있는 영동장에 갔다. 가는 길가에는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붉은 산자락을 안고 있는 깊고 푸른 물에는 조각구름까지 떠다닌다.

시장 곳곳에는 빨간 홍시감과 땡감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다. 감 주인은 한쪽 구석에 있는 거무튀튀하고 볼품없는 홍시 한 개를 맛보라고 집어준다. “우리 집 감이 맛은 있지만 누구라도 고운 홍시에 손이 먼저 가지유. 하지만 잡숴 보면 알거유.”

그렇다. 겉모습과는 달리 못 생기고 흠집 있는 홍시를 한입 먹자니, 세상에 이 단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가을이 지나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그 감에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다 들어있어서인지 단맛이 사뭇 오묘하고 진득하다. 그때서야 부러울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유년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는 뒤뜰 감나무의 홍시를 따서 내 입에 쏙 넣어 주었다. 그 때는 그 사랑을 모르고 돈 많은 부모를 둔 친구를 부러워하며 돈 없는 엄마를 원망했다. 감꽃이 피고 파란 땡감이 열리고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나무에서 양분을 받는 게 아니라 제 안에서 단맛을 내는 감의 지혜를 얻었다. 빛깔도 곱고 맛도 좋아지기까지는 제 스스로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 익은 후에도 천천히 오랜 시간 자신을 더 숙성시킨 맛이 달콤하듯, 그렇게 한 개의 홍시가 제대로 익어 맛을 내는 데에도 사 계절이 다 필요하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급하게 서두르고 안 되면 포기하고 잘 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홍시 한 개를 먹고 나니 뱃속이 든든하다. 고마움에 탱글탱글하고 잘생긴 감 두 박스를 사가지고 왔다. 오는 길에는 어릴 적 엄마를 따라 대구 외갓집에 가기 위해 이원역에서 열차를 기다렸던 추억이 떠올라 이원역에 들렀다. 붉은 감들이 매달려 있는 감나무가 나를 반기는 듯했다. 한참을 차를 멈추고 엄마 생각을 했다. 유달리 감을 좋아했던 엄마는 감을 깎은 껍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잘 말려 간식으로 먹곤 했다. 그런 엄마의 정성을 모르고 철없이 남을 부러워만 했던 시절이 파란 땡감이었다면, 이제 나는 잘 익은 감이 되었다.

쉼터에 와서 감을 펼쳐 놓고 보니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하나씩 감을 깎아 끈으로 매달아 놓고 저절로 말랑 거릴 때를 계산해 본다. 아마도 한 달 이상이 지나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도 어느 정도 성숙할 때까지는 뿌리가 주는 양분으로 자라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제 스스로 익어야 한다.

곶감을 깎으며 다시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이 있지만 그때에는 젊음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 줄 미처 모른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이 부럽고 미래가 불확실한 젊음이 내심 불안하기도 하다. 때로는 나보다 솜씨 좋은 사람이 부럽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부러웠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 넘치게 누리는 금수저들도 그렇고, 무슨 복을 타고 났는지 하는 일마다 척척 잘 풀리는 사람도 부러웠다. 그렇게 저절로 주어진 것만이 행복으로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다 똑같이 늙어가며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직도 산기슭 감나무에는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감이 익어 갈수록, 나도 빛바랜 낙엽과 같이 익어가고 있다. 인생의 중년기를 넘어선 지금, 가을날 맑은 하늘빛 아래 잘 익은 감들의 풍요로움을 가득 담아 겨울 준비를 해야겠다. 가을걷이를 해서 곳간에 가득 쌓아놓고,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앉아 홍시를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듣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뒤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들이 맛있는 곶감이 되어, 고마운 분들의 입맛을 돋우는 행복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