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시절에 향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공부를 왜 하는지,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기억이 없다. 결국, 운명이라는 집채만 한 파도는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켰고.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은 채 낯선 무인도로 떠밀어 보냈다. 그곳은 2차 지망으로 턱걸이한 지방대 독어독문학과였다.
결국,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군대 입대를 하게 된다. 거기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멘토를 만난다. 운명이었을까? 처음에는 악연으로 만났다. 그는 내가“ 낙하산”이라고 생각하고, 상당 기간 정당하지만 사소한 것들로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당시에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서 그것을 깨트려 부수는데 웬만한 충격 요법으론 안됐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사소한 행동들이 나를 괴롭힘을 목적이었지만 나에겐 중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극약 처방 같은 것이었다. 내가 버려야 할 나쁜 습관들 덩어리들을 날카로운 칼로 하나하나씩 발라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언젠간 사소한 지적이 없어질 것이고 그날엔 나는 좀 더 완벽한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편견과 선입관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문서수발 업무로 인해 1시간 30분 정도 산책할 기회가 왔다. 어색한 정적을 깬 첫마디는 “한상병님 고맙습니다” 였다. 그의 눈에서 당혹스러움이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편견과 선입관이라는 커튼을 걷자마자 그에게서 그로부터 얼마 후 진정한 거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지독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의 학업을 뒷받침해줄 여력이 안됐다. 하지만 당시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조건으로 큰아버지의 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에겐 공부가 유일한 ‘위안’ 거리이자 친구였고 자기의 가족들을 궁핍에서 벗어 나게 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에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성장 배경 탓인지
자신도 모르는 콤플렉가 그의 장점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부대원들 사이에서 왕따였고,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작은 키, 깡마른 체구, 기이한 행동들,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 등 때론 천박한 행동들로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존재였다. 그 광경을 목도하기 전까진…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지금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 인 것처럼 내 기억에 생생하다. 12월 중순 한겨울이었다. 내무반에서 자고 있던 중 나는 심한 갈증으로 인해 잠을 깼다. 그때 복도의 맨 끝쪽 부속실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발길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아, 그 황홀감이란…
새벽 1시쯤 되었다. 창밖으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영, 불어로 된 시집, 라디오에는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영시를 번역하는 일에 몰입한 나머지 나의 인기척도 알아채지 못했다. 온기 하나 없는 사무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경외감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저녁을 먹지 않았었다. 그는 ‘배고픔’을 시와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함박눈은 그의 포근한 외투가 되어 주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우라가 휘황찬란했고, 평온하며, 진지하면서도 무엇인가에 몰입된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거인이 되어 내 가슴속에 훅 들어왔다.
그 거인은 대학과 전공에 대한 열등감과 회의감으로 인한 헛된 몽상에 빠져 있던 나에게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네가 영어 혹은 독일어 대한 전문가가 되는 데 있어서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너의 마음 먹기에 달린 거야”. “그리고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영어는 기본이고 독일어 하나쯤은 해야 할 거야” 그러니 편입시험 같은 것에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과 제한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