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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5년 전 신미대사 한글 번역본 있다한글 창제 주역 역사 뒤집는 획기적 주장 나와
박한열 작가 뮤지컬 ‘나랏말싸미’서 새로운 시각
도복희기자 | 승인 2018.10.11 17:09

지난 9일 제527돌 한글날 경축식 축하공연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번 경축식은 한글날이 국경일로 격상된 2006년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실외 행사로 진행됐다. 같은 날 뮤지컬 ‘나랏말싸미’ 무료공연이 보은문화예술회관에서 올려졌다. 이 공연은 한글창제의 주역이 세종대왕이 아니라 신미대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된 공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박한열 극작가를 만나 신미대사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 박한열 작가의 ‘나랏말싸미’ 배경
박한열 작가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창제한 것이 아니고 기존에 사용하던 한글을 복원 정리한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 자료도  제시했다. 조선왕조실록, 상소문 등에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25년 계해(1443) 12월 30일(경술) 훈민정음을 창제하다에서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라고 했다.

여기서 박 작가는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에 주목한다. 한글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의 고전문자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또한 신미대사의 불경 번역본에도 언문이 사용되었으며, 이들 번역본은 세종의 한글 창제 5년 전, 반포 8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신미대사가 남긴 현존하는 기록물로는 보물 10여점과 국보 292호 1점이 있다. 772호 금강경삼가해, 774호 선종영가집, 761호  능엄경, 762호 능엄경, 763호 능엄경, 764호 능엄경, 765호 능엄경, 770호 목우자 수심결, 767호 몽산화상법어약록-보물, 768호 몽산화상법어약록-보물 등이다.

박 작가는 “불편 하더하라도 역사를 솔직하게 보는 것이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세종대왕이 성군이라고 해서 세종의 업적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없던 사실을 만들어내는 일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란 생각에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이를 뮤지컬 대본으로 작성, 공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랏말싸미’라는 뮤지컬 공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잘못된 역사적 견해는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책임”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의 주장대로 신미대사(김수성)가 기존에 있던 한글을 복원 정리 했다면 그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듯하다.

왼쪽부터 법주사 도봉스님, 박한열 작가, 김만상 신미대사 25대 손.

△ 신미대사(김수성)의 흔적을 찾아서
김수성의 법명은 신미(信眉)다. 1403년~1405년(형제들의 출생으로 추증) 사이에 출생, 1479년~1480년(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추증) 사이에 사망한다. 증조부 김길원(金吉元, 永山君), 조부 김종경(金宗敬), 부친 김훈(金訓) 옥구진 병마사, 부인은 여주 李氏다. 부인은 대제학 이행(李行)의 막내딸이자 직제학 이적(李逖)의 막내여동생이다. 이적의 딸이 예문응교로 재임할 때 한명회에게 시집을 갔다. 한명회는 신미의 외종질이다. 동생은 김수경, 김수온(영중추부사 , 1474년), 김수화(안동부사, 1470년)로 동생들은 1430년대 중반 이후 신미의 영향력으로 권력을 잡는다.

△ 세종과 신미
세종이 1443년까지 한글창제 연구를 10년 동안 할 때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함께 했는데 그 때 금중에 출입하며 법사를 열던 신미는 수양(당시의 대군명은 진양대군이다)과 안평의 각별한 인연으로 한글창제 연구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그러나 신미가 한글창제에 관여한 흔적과 기록은 없다. 대군들과의 두터운 친분관계를 통해 관여한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신미대사가 불교경전 등을 조선 최초로 한문을 한글(언문)로 번역한 것들을 보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세종은 자모음 28자를 만들어놓고도 자신의 안질과 어린 대군들의 질병으로 한글창제 반포를 즉시실행하지 못했다. 신미는 세종의 안질 치료를 돕기 위해 궁에서 법사를 열었고 1444년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이 졸했을 때도 1445년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 졸했을 때도 1446년 4월 소헌왕후가 졸했을 때도 그들의 사후전과 사후에 궁에서 법사를 열었다.

특히 1446년 소헌왕후가 투병 할 때는 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궁내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왕실의 태평과 왕후의 쾌유를 비는 법사를 자주 열었다. 세종은 그 때 신미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세종은 신미의 노고를 치하하며 높이 존경했고 신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도 신미를 존경하며 추앙했다. 세종은 1446년 당시 집현전 교리였던 김수온에게 석가보 증수를 명했는데 신미가 동생을 도와 석가보를 증수했다.

△ 신미의 관직생활
세종은 신미를 치하하며 총승의 관직을 제수했고 후엔 판교선종의 관직을 제수했다. 세종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도 신미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 법사를 열정도로 신미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다.

신미는 세종이 죽자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어머니가 머물러 있던 복천사로 들어가 수행을 했으며 1450년 6월 신미가 복천사를 중건 할 때 문종이 복천사 중건을 지원했다.

세종이 졸하고 보위에 오른 문종(이향)은 대간들의 빗발치는 간쟁에도 불구하고 선왕의 고명을 받들어 신미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관직을 제수했다.

△ 신미와 세조
세조의 나이 17세 후부터 신미의 나이 28세 후부터 알게 된 매우 각별한 인연이었다. 수양이 정권을 잡던 1453년 계유정난과 1455년 단종을 상왕으로 앉히고 자신이 보위에 오를 때에도 책사의 역할을 한 수양이 절대 추앙한 인물이다.

신미는 세조로부터 많은 땅과 재산을 하사 받았고 조계종이 부유한 까닭이며 오대산 상원사가 부유한 까닭이다. 수양대군의 처음 대군명은 진양이었다. 진양이라는 이름이 안 좋아 수양대군으로 개명을 했는데 신미가 지어준 대군명이다. 왕실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수양은 신미를 찾았으며 늘 신미와 함께 했다. 수양과 안평은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무릎 꿇고 절을 하는 등 신미를 어려서부터 존경했다. 그런 일들로 인해 대간들이 세조에게 자주 간쟁을 하였다.

수양이 보위에 올라 신미를 조정의 왕사로 모시기 위해 한양의 궁궐로 올라오라고 복천사에 머물던 신미대사에게 어찰을 보냈는데 당시 신미대사는 신명이 어찰을 보우하사 속리산을 떠날 수 없으니 복천사로 내유해달라는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각별했다.
신미는 세조의 왕사로서 승도들을 이끌고 많은 불교 경전들을 한글(언문) 번역 했으며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현재 가장 오래 된 한글 번역문으로 국보로 등록 돼있다.

△ 박 작가의 당부
박한열 극작가는 “‘공연 내용을 통해 관객들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길 바란다”며 “인식을 제대로 하기 위해 즐거움과 감동을 전해 줄 사랑이야기를 집어 넣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묻혀 있던 신미에 대한 역사가 진실하게 밝혀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이번 뮤지컬 ‘나랏말싸미’가 전국적인 파급 효과를 통해 전 국민이 보고 싶어하는 공연물로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도복희기자  okhs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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