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서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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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서 목포의 눈물
  • 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 승인 2018.10.2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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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일제 36년의 정치적 경제적 압박과. 탄압 속에서 지배를 받아온 주체성 없는 나라로서 자나 깨나 민족 해방의 꿈을 자장가 삼아 불러온 대중가요는 삶을 북돋아 주었고 민족의 한을 이루어 놓은 승리의 햇빛이 되었다.

지역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중가요가 최근 많이 늘어났지만  유독 목포의 눈물은 일제 탄압 속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왜색 풍조의 가요로 수난이 많았던 곡이다. 1920년 축음기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레코드를 통한 대중가요는 가수가 탄생하기 시작했고 작사 작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가난과 설움에 찌든 서민들에게 생의 의욕과 민족해방의 꿈을 심어주었고 우리 겨레의 얼과 삶을 지속시켜준 활력소가 되었다.

그 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독립되어 기뻐하던 환희의 시대가 있었으며 당시 우리 국민들은 노래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대중가요는 감출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한 시대 한 민족의 거짓 없는 표상[表象]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주옥같은 관심사로 누구나 부담 없이 접해왔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년)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 이 노래는 일제 민요의 일종인 향토 노래로 발표 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조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노래의 주인공 이 난영 이 죽은 뒤 목포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뜻으로 난영가요제를 개최 했으며 1968년에 호남 매일신문사 주최로 시작된 이 가요제는 한때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문화방송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1969년에는 목포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최초로 건립되기도 했다.

또한 목포의 눈물은 1980년대와 90년대 호남지역을 연고지로 한 프로 야구팀의 응원가로 불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결국 목포의 눈물은 일본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과. 그리고 호남적인 것까지 가추고 있다고 여겨지는 셈이 된다. 물론 여기서 일본적인 것은 껄끄러운 문제다. 사실상 목포의 눈물만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유행가 20세기 후반 트로트는 적잖이 경멸의 뉘앙스가 담긴 장르genre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트로트 일반의 왜색 이라는 주홍 글씨까지 얻게 되었다. 트로트의 왜색을 지적하는 음악의 비평적 근거는 무엇인가? 까다롭게 트집을 잡는 근성이 대단했다.

1960년대 이후 트로트 왜색 논쟁이 초래한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식민지 조선의 유행가 전체를 트로트라는 이름의 한 가지 장르로 그려보게 된 데에 있다. 해방 전 후 음반 산업이 침체상황을 겪은 데다 6. 25한국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대중음악의 양식적 단절 내지는 퇴행이 이루어진 점.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계기로 미군의 대중음악이 직수입되면서 음악 청취자들의 취향이 점차 미국화 되었다.

제3공화국 군사 정권에 의해 시도된 광범위한 왜색문화 일소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미국식 팝 음악 나중에는 록음악 포함과 트로트의 이분법적 구분이 이루어지기 시작 했다. 식민지 시기의 대중음악이 장르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했다는 사실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모조리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호남정서를 대변 화합과 하면 된다는 개념이 확고한 지역민의 좋은 장점이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군사 혁명이라든가 5.18 쿠데타 살벌하고 끔찍한 만행의 현장을 수많은 사람들이 몸소 격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민주화 운동의 학생 희생이 많았던 점으로 보아 우리가 익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망각성이 있어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력이 잊어지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전라도의 몰표가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 시켰고 문재인 대통령도 이 지역의 결과로 당선이 되었다 매번 선거 때마다 유권자의 표가 몰려다니는 현상이 당선의 기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역민의 결집이 투철한 것은 어제 오늘의 개념이 아니다. 국제 관광지로 부상하는 제주도의 관문인 목포항 쾌속정은 이난영 목포의 눈물이 끝 일줄 모르게 흘러나온다.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사랑 목포의 눈물처럼 목포는 슬픔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목포는 변신 중이다. 아픈 역사와 흔적을 품었으되 떠남보다 머뭄이 어울리는 곳이 되고 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 가? 목포 유달산 노적봉 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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